차창 밖으로 낯선 모양의 흰색 RV차가 지나간다.
“처음 보는 차네? 뭐지?”
“산타페 신형.”
“으엥? 그래? 모양이 완전 바뀌었네? 우째.... 구급차처럼 생긴 것 같기도 하고.”
산타페를 떠올리면 동글동글한 모서리가 먼저 생각나는데
반듯하게 각진 모서리를 한 커다란 박스 모양의 새 모델은 도무지 어색해서 볼 때마다 다시 묻고는 한다.
오래 전 동생의 새 차는 브라운색 산타페였다.
동생의 어렷을 적 별명이 곰이라 차도 곰을 닮았구나 했는데
그 차는 어쩐지 곰보다는 너구리 느낌이 났다.
옷이며 신발 주방용품 등 물건을 구입할 때 한 번도 고려 대상이 아니었던 색상이 브라운 계열이었다.
어렸을 때 크레파스를 다 쓰도록 새 것으로 남아있는 유일한 색이 고동색이었다.
특별한 트라우마가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그 색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나보다.
친척의 결혼식에 갔을 때 고동색 양복을 빼입었던 외사촌 오빠의 모습이 무척 촌스럽다고 느껴져 고동색 양복을 입은 남자는 절대 만나지 않을 거라 맥락없는 결심을 한 적도 있었다.
그랬으므로 K가 양복을 살 때 브라운 계열의 것을 들여다 보는 것 만으로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했었다.
그 무렵 새로나온 산타페의 대표 인기색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나는 그 색을 고른 동생이 참 독특하다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얼마 후에 오빠가 은회색 산타페를 샀다.
딱 오빠 답다 싶었다.
아직도 적성이라고 해야할지 연천이라고 해야할지 헷갈리는 아버지 산소에 갔었다.
신도시 개발이 되면서 선산이 휴전선 가까운 곳으로 옮겨졌었다.
산의 위쪽 공터에 차를 세우고 묘소로 내려오는 모양새가 어째 좀 불경한 느낌이 드는 것 말고는 날 좋은 날이면 소풍처럼 가기에도 좋아 가끔 한 번씩 가족 나들이를 가고는 했다.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차 세 대가 도착했다.
가족 중 가장 먼저 운전을 해서인지 아니면 까칠한 성격탓인지 동생이 운전하는 차는 늘 민첩하고 매끄러웠다.
너구리가 맨 안 쪽에 그 옆에 뾰족함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은색 산타페, 그리고 마지막에 우리 첫 차였던 십 년 된 세피아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 모양을 보고 문득
‘산타페 셋이 서 있으면 재미있겠다.’
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세피아를 바닐라화이트 색 산타페로 바꾸는 데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이제 아버지 한테 갈 때면 산타페 석 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겠다 생각하니 뭉클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보면 오빠와 나 사이에, 없으면 좋았을 일이 생겼고
하여 오빠의 가족과 십 년 가깝게 거리를 두고 지냈다.
그러는 동안 아이들은 대학에 갔고 졸업을 했고 직장인이 되었으며
동생은 차를 바꿨고 우리는 미국에 가느라 오 년된 산타페를 팔았다.
사실, 산타페를 타고 아버지에게 간 적은 많았다.
다만 산타페 삼총사가 자유로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가는 상황이 일어나지 않았을 뿐.
얼마전 K의 고등학교 동창들이 정선으로 일박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는 오빠와 K가 카풀을 하게 됐고 여느 때처럼 K가 오빠의 차를 타고 가는 줄로 알았다.
그런데 출발 며칠을 앞두고 오빠가 K의 차를 타고 가자고 했단다.
운전하기 싫어하는데다 고등학교 때 쩨쩨파리로 불릴만큼 잠이 많은 K는 졸음 때문에 운전 지속시간이 심하게는 삼십분을 넘기기 힘들 정도다.
걱정되는 마음으로 K를 배웅하고 생각해보니 오빠의 차는 아직 그 은회색 산타페였다.
몇 달전 오빠 가족과 밖에서 식사를 하고 집으로 들어갈 때
앞서가는 오빠의 산타페가 엑셀을 밟을 때마다 시커먼 연기를 토해냈던 장면이 떠올랐다.
대충 손가락을 꼽아봐도 거의 이십 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한 번 손에 들어온 물건을 어지간해서는 버리지 않는 오빠 방은 니콘 F2에서 시작해서 온갖 카메라와 장비들로 그득 차있다. 고장난 아이맥스는 물론 지금은 쓰지 않는 노트북, 스피커 등등 컴퓨터 관련 물건들도 정많은 주인 덕분에 비좁은 자리에 끼어앉아있다.
그래도 그렇지 자동차는 다른 문제 아닌가?
여행에서 돌아온 K가 한 술 보탰다.
자동차 사업을 했던 동창 중 한 명이 오빠의 차 소리를 듣고는 당장 바꿔야겠다고 하더란다.
모르긴 몰라도 미련이 병인 오빠는 지금쯤 오래된 산타페와의 이별을 준비중인지도 모르겠다.
산타페 세 대가 함께 아버지에게 간 적도 없지만 각자 다른 차를 타고도 함께 그 곳에 간 적은 없다.
엄마는 나이가 들수록 자식들의 삐죽빼죽한 마음들이 무뎌져 오순도순 의좋은 삼남매를 상상했을지 모르지만 현실은 엄마의 바람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
“산타페 타고 아버지한테 가고 싶었어.”
묻지도 않았는데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다.
들었는지 말았는지 언제나 그러하듯 K는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