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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숙 Jun 16. 2024

참는 게 전부는 아니었던 것 같다


청소기가 또 말썽이다. 산지 얼마 됐다고...라며 손가락을 꼽아보니 그게 벌써 팔 년이 다 되어간다.

오래 쓰긴 했네 싶으면서도 그래도 살 때 가격을 생각하면 억울한 감이 없지는 않다.

광고를 보고 물건을 구입한 적이 없었는데

이 청소기는 TV광고에 혹해서, (정말 청소가 엄청 잘 되는 것 같아서) 게다가 청소기치고는 고가라 생각하니 몸값은 하겠지 싶은 근거없는 믿음도 한 몫을 했다. 


그 것이 요즘들어 청소를 하다가 자주 꺼진다. 

집게손가락으로 시동버튼을 누른채 사용하는 것이 처음에는 무척 불편했으나 차츰 익숙해진 터라 혹시 내 손가락 힘이 없어져서 그런가 했었다. 

그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멈추는 횟수는 점점 늘어났다. 

멈췄지만 다시 누르면 가동이 되니 그냥 쓰고 충전기에 걸어두고는 했다.

급기야 어느 날엔가는 멈추더니 다시 켜지지를 않는지경까지 되었다.

K가 AS센터에 가져갔더니 거기서는 또 잘 되더란다.

그냥 쓰다가 더 심해지면 배터리를 갈아야 할거라고 했단다.

하긴 폰이 잘 안 돼도 수리기사 앞에서 증상이 없으면 딱히 해 줄게 없고

설령 증상이 있더라도 뜯어서 고치는 일은 없고 리퍼제품으로 사든가 아니면 새 제품으로 사는 편이 낫다는 권고를 받는 경우가 많은게 사실이다.

청소기도 예외는 아니라서 팔 년 쯤 됐으면 배터리 뿐 아니라 필터며 헤드 본체 등 뭘 바꾸라도 해도 이상할 일은 아닌 것이다. 

부품값이 만만한 것도 아닌데 바꾸라면 바꿔야하고 새로 사라면 살 수밖에 없을 터이니 그냥 참아가며 쓸만큼 쓸 생각이었다. 

다시 두어 달이 더 지났고 청소기의 상태는 점점 나빠져, 청소를 할 때마다 짜증이 버럭버럭 나서 차라리 빗자루 들고 쓰는게 낫겠다 싶을 무렵 다시 AS센터에 갔다.

거의 반 년 가까이 청소할 때마다 마음을 바글바글 끓인 것이 무색하게

배터리와 필터를 바꾸고 나니 가동소리부터 완전히 달라졌다.

세상 부드럽고 조용한 모터 소리에 의아해하는 표정을 보고는 수리기사가 


“필터를 교체해서 그런 거예요.”


한다. 

하여 십이만구천원을 들인 후 청소기는 조용하고 매끄러우나 성능은 더욱 강력해진 것처럼 만족한 청소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미련하게 참는게 전부는 아니었던 것이다. 



토요일 낮, 막 점심을 먹으려고 하는데 K의 전화가 울렸다.

시누이가 부모님을 모시고 용인에 왔는데 어머니가 작은 아들네 가고싶다고 했단다.

한 시간 쯤 후에 집근처 평양 냉면 집에서 만나기로 하고 나갈 준비를 했다.

먹으려고 펼쳐놓았던 식탁부터 치우고 머리를 감고 옷만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평양 냉면에 평양식 만두를 주문했지만 평양음식 고수이신 어머니 성에는 안 찰것이 분명한데도 어머니는 평소보다 꽤 많이 드시고는 ‘자알 먹었다.’ 라는 인사를 빠뜨리지 않으셨다.

집으로 모시고 와서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손을 씻으러 주방으로 오신 어머니가 ‘커피향기가 좋다.‘ 하셨다.

혹시나 해서 여쭸다.


“믹스커피 말고 여기 설탕 넣어서 드릴까요?”


어머니는 들릴 듯 말 듯 하게 “응”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어머니의 눈길이 설거지를 담가 놓은 개수대에 머문 것이 느껴졌다.


“이 집이 어째 설거지를 다 쌓아놓고...”


하셨을 때 바짝 주눅이 든 상태로 가슴은 두근거리고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던 삼십년 전의 나와는 달리 


“애들이 설거지 기계를 사 줘서요, 모아서 저녁에 한 번에 해요.”


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K2가 여행을 가면서 맡겨놓은 코기까지, 집에는 개가 두 마리나 있었고 침을 많이 흘리는 코기 때문에 바닥은 온통 얼룩덜룩 했으며 오늘은 청소도 하지 않은 상태였는데도 시어머니 앞에서 전혀 당황하지 않는 내가 신기하면서도 한 편 기특했다. 


신혼 시절, 이웃집 예비며느리가 결손가정에서 자란 사람이라며 가정교육을 운운하실 때

죄 지은 것처럼 주눅이 들어 고개를 떨굴 것이 아니라

’편견이십니다 어머니, 어머니 며느리는 이렇게 바르게 잘 자랐잖아요.‘라고 했어야 했다.

’우리 K가 결혼을 하고는 스타일이 망가졌어. 내가 옷을 사입힐 때는 멋있었는데.’

라고 했을 때는 속상한걸 참느라 억지 웃음을 웃을게 아니라

‘옷 입는 감각은 없어도 살림은 알뜰하게 잘 하잖아요 어머니.’

라고 너스레를 떨었으면 좋을 뻔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시절로 돌아간다고 해도 내가 그렇게 말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다만 지금은 참고 감수하고 견디는 일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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