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2 집에 공사할 일이 있어 얼마간 우리집에서 지냈다.
사람 둘의 것보다 많은 개 두 마리의 짐을 산더미처럼 싸 가지고 왔다가 일주일 머물고 간 후
밀대로 밀고 청소기 돌리고 물걸레를 돌렸는데도 어디선가 또 털뭉치가 나와 돌아다녔다.
욕실에 들어가니 아이들이 두고 간 칫솔 옆에 통통해진 클렌징폼 튜브가 눈에 띄었다.
그 집, 혹시 치약 튜브를 끝부터 짜냐 배부터 짜냐를 가지고 실랑이를 하지 않을까 생각이 스쳤다.
매우 사소한 습관의 차이지만 치약튜브건이 부부싸움의 불씨가 되기도 한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었다.
배부터 꾹 눌러 짜는게 편하면 그렇게 하면 되고 끝부터 꼼꼼이 짜는게 좋으면 또 그러면 될걸 하지만 끝부터 누르던 입장에서는 가운데를 눌러놓은 튜브를 펴기란 이만저만 짜증이 나는 일이 아니다.
그게 꼭 치약을 아끼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뭔가 깔끔하지 않다는 느낌 때문이었는지 한 때는 알뜰 치약짜게를 이용한 적도 있었다.
다행히 K의 생활습관은 FM이라서 양말을 뒤집어 벗어놓는다거나 아무데나 던져 놓는일은 없었다. 빨래는 빨래통에 집어 넣고 세탁한 수건을 접을 때는 똘똘 말아 깔끔하게 각을 세워놓으니 어떻게 보면 나보다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렷을 때부터 엄마가 하는 말은 된다 괜찮다는 말보다, 안된다 하지마라, 는 말 일색이었다. 그렇다고 늘 사고를 치거나 못된 짓을 하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도 그랬다.
내용은 주로 이랬다.
밥먹고 바로 누우면 소 된다. 밤에 손톱 깎으면 안 된다. 문지방을 밟고 서면 안 된다.
밤에 베개를 세워놓으면 안 된다. 우산은 집안에서 펼쳐 놓으면 안 된다.
밤에 휘파람 불면 뱀 나온다. 등등 근거가 불분명한 말들이 끝도 없었다.
그걸 또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 지켰다.
그 중에도 제일 섬뜩했던 부분은 밤에 휘파람 불면 나온다는 뱀이었다.
낮이고 밤이고 뱀이 반갑지 않기는 마찬가지지만 구태여 밤에 휘파람까지 불고 싶지는 않았다.
일부러 가르칠 생각은 없었는데 엄마의 딸이다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전해내려오는 금기들을 아이들에게 그대로 전했었나보다.
우리집에서 가족 모임을 했던 날, K1이 밥을 먹은 후 소파에 길게 누웠다.
“밥먹고 바로 누우면 소 된다?”
괜히 장난을 치고 싶어 한마디 했더니 그 말 할 줄 알았다는 듯 진지한 얼굴로 바로 맞받는다.
“내가 말이야. 어려서부터 그 말을 듣고 정말로 소가 되나 해서 밥먹고 바로 누워봤거든?”
“!@#$%&^%”
“근데 안 되더라구? 히히”
어이가 없어서 뽀얗게 눈을 흘기면서도 어쩐지 내 마음이 다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밥 먹고 바로 누우면 역류성 식도염에 걸릴 가능성이 있겠고
불빛이 밝지 않던 시절, 밤에 손톱을 깎으면 다칠 위험이 더 있었겠지.
문지방을 밟고 섰다가 중심을 잃으면 발목을 삘 수도 있고
밤에는 세워놓은 베개가 사람인줄 알고 놀랄 수도 있으며 집안에 펼쳐놓은 우산 뒤에 도둑이 숨어있을수도 있으니 접어놓으라는 말이겠지.
왜 그 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엄마말 잘 듣는 착한 어린이가 되려고 엄마의 아바타로 살았던 것 같다.
해서 요즘은 많이 늦은감이 있지만 삐뚤어진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밥 먹고 졸리면 소파에 기대서 잔다.
밤에 손톱이 거슬리면 불 켜놓고 안경쓰고 깎는다.
문지방은 애초에 없다.
베개는 세워서 등까지 받치고 책을 보니 편하다.
양말은 책상이든 소파든 앉은 자리에서 발로 벗어 아무데나 둔다.(K가 잔소리 겁나게 한다.)
치약이며 클렌징 폼 트리트먼트 등 튜브제품은 배부터 푹 눌러 짠다. (세상 편하고 좋다.)
식탁위 맛있는 반찬부터 먹어치운다. (먼저 먹는 사람이 임자지.)
휴일에 길게 드러누워 TV보기. (카우치 포테이토는 K의 오래 된 로망이었다.)
큰일 날 줄 알았는데 별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럴줄 알았으면 나도 K1처럼 좀 더 일찍 하지말라는 걸 해볼 걸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