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직비 봉투

by 문과체질 내과의사

후배가 나의 병원을 찾았다.
그는 의사 면허를 갓 딴 햇병아리 의사였다.
개원하고 있는 선배가 어떻게 살고 있나 구경하고 싶다고 했다.

전문의가 되는 험난한 길의 종착점이 조그만 진료실 속 삶인 것을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초롱초롱한 그 눈빛의 환상을 시원하게 깨 주는 것도 좋겠다 싶어, 병원으로 오라고 했다.

그렇게 그는 내 진료시간에 참관했다.

내가 말했다.
"후배야~ 너도 이제 면허가 있으니까 내가 진료 보는 거 옆에서 보고 감기약 오더 한번 넣어봐. 내가 옆에서 봐줄게~"

나는 이제 눈 감고도 하는 감기 처방이었지만 후배는 오만 인상을 쓰고, 또 고민하며 약을 골라 처방했다.

"... 선배, 이렇게 처방해도 될까요..? "

나는 가소롭고도 순진한 그의 처방을 수정하여 처방전을 뽑았다.
초보 의사 후배의 어설픈 모습을 보고, 꽤나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나의 과거가 떠올랐다.


나 역시 풋내기 의사일 때가 있었다.
의사 면허증을 받고, 나의 무지함을 유일하게 받아주는 병원 인턴 생활을 시작했었다. 태생이 아웃사이더였던 나는, 야만적인 응급실 스케줄을 버티지 못하고 인턴을 때려치고 나왔었다.

할 줄 아는 거 하나 없이 면허증만 있던 나는,

무늬만 의사였다. 그래서 나를 써준다는 곳은 여기저기 마다하지 않고 돌아다녔다.
요양병원 당직, 개인병원 대진, 365 의원의 주말진료, 전국을 다니는 출장검진 등.. 말 그대로 일용직 의사였다.

그때의 나도 환자에게 처방을 내는 게 무서웠었다.
' 책에 나온 대로 용량을 쓰긴 했는데. 부작용 나면 어떻게 하지..? '
' 내가 괜히 아픈 사람 몸 망치는 거 아니야..? '

그리고 모든 걸 다 해야 하는 시골 병원에선 덜덜 떠는 손을 달래며 실과 바늘을 환자의 상처에 들이댔었다.

그땐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가진 건 쥐뿔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당직이 끝나고 하얀 봉투에 받는 만 원짜리 묶음이 그렇게 좋았었다.
추억은 미화돼서 일까? 그때를 기억하는 것만으로 미소가 지어졌다.


당직을 끝내고 요양병원을 나올 때 눈이 부셨던 아침,
지방 출장 검진을 끝내고 터미널에 도착해 봉고차에서 내리던 그 순간,
생전 처음 가본 동네에서 대진을 마치고 낡은 상가를 나오던 순간들.
모두 다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에겐 막연한 기대 같은 게 있었다.
의사면허를 땄을 땐, 난 무슨 과를 하게 될까..?
대학생이 됐을 땐, 사회인이 되어 돈을 벌면 얼마나 좋을까..?
수험생일 땐, 대학생만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었다.

그런 기대가 내 젊은 날을 행복하게 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프니까 청춘이 아니라,
열정이 넘쳐서도, 얼굴이 팽팽해서도 아니라,
막연하기 만한 그런 기대가 힘든 오늘을 버티게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초롱초롱해 보였던 후배의 눈도 그런 기대였을 꺼라 생각하며, 오전 진료를 끝내고 그를 보냈다.

점심을 먹고 오후 진료를 위해 병원에 들어왔다.
안락의자 뺨치는 나의 진료실 의자에 앉았다.
20년 전 그때처럼 내가 일거리를 찾지 않아도, 사람들이 나를 찾아오고 있었다.
환자 잡는 초짜였던 내 처방은, 이제 약의 개수와 색깔까지 적당히 맞춘 그럴싸한 처방이 되었다.
학생같이 가소롭게 보였던 의사는 이제 능글맞은 아저씨가 되었다. 그리고 그 능청스럼에 비례해서 가진 것도 늘었다.

오늘 나의 기대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음.. 하루의 매출 말고는 딱히 목표인 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 정확한 숫자 놀음에 막연한 기대 같은 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의사로서 내 인생의 목표를 개업으로 정한 적은 없었다. 그저 여차저차 지내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젊은 날의 막연한 기대의 종착지가 속칭, 동네 점빵인 게 아닌가..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막연한 기대만 가지고, 진짜 내 꿈이 뭔지 생각하지도 않고 산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 누군가는 자기 묘비에 그렇게 썼다지...
' 우물쭈물하다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지..!! '

그렇게 잡념이 섞인 오후 진료를 마쳤다.
여차저차 그놈의 하루 매출을 채웠고, 만족보단 안도감을 느끼며 병원을 나왔다.

며칠 사이, 날이 부쩍 따뜻해져 안 올 것 같던 봄이 온 것 같았다. 오랜만에 떠올린 나의 풋내기 의사 시절도 바로 지금 이 계절이었다.
기분 좋았던 그때의 나를 다시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웃으며 당직실을 나오던 순간,

홀가분하게 봉고차에서 내리던 순간,

모두 나의 손엔 하얀 봉투의 당직비가 손에 쥐어져 있었다.


오늘은 그때보다 더 두둑한 봉투 한 장 받았다 생각하니 미소가 지어졌다. 중년의 나이에, 돼도 않는 기대를 다시 한번 해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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