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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새 May 15. 2022

한나 아렌트 #6 - <라헬 파른하겐> 필사

한나 아렌트, 『라헬 파른하겐』 필사


2

- (필사)


희망은 주위 상황이 간과했을지 모를 극히 작은 틈, 아무리 좁아도 불명확한 세계에 중심을 규정하고 조직하고 제공하도록 도우려는 그 틈을 찾아내기 위해 인간이 세계를 여기저기 자세히 응시하도록 유혹한다. 간절히 기다리던 예상 밖의 무언가가 분명한 행복이라는 형태로 마침내 출현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온힘을 쏟아부었음에도 행복하게 하는 그러한 틈과 우연을 찾지 못할 때, 희망은 절망을 야기한다. (한나 아렌트, 『라헬 파른하겐』, 33p)


도로테아 슐레겔은 단 한 번 인생과 조우했는데, 바로 슐레겔을 만나 사랑받을 때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 한 순간을 불멸화함으로써 지체 없이 다시 인생을 버렸다. 그녀의 인생에는 이야기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 인생은 빠르게 지나간 한순간의 경험만을 고집스럽게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정말로 자신의 인생을 그 한순간을 위해 던져 버렸다. (같은 책, 55p)


어쩌면 개인에게 일어나는 일은 오직 그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발전시키기 위해 발생하는지 모른다. 무한한 것의 충격이 그를 휩싼 "숭고한 순간"에 그 개인은 이미 "완성"되었고 "통합된 전체"로 자신을 형성했으며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웠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일까? (같은 책, 87p)


"행운과 불운보다 더 신성한 것은 없다." 그의 최초의 행복은 동시에 그의 평생에 대한 좋은 신호였으며, 운명에 의해 망각되지 않으리라는 확신, 외부의 힘에 좌우될지라도 인간은 그런 힘들과 함께 선량한 인간적인 관계에 의지할 수 있으며 그것들과 더불어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었다. 그와 같은 협상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비탄은 무엇이든 즉시 피할 수 잇을 것이었으며, "그것을 형성하는 심원함을 통해 영혼의 결실을 거두는 작업으로" 전환될 것이었다. 고통은 "굴복" 속에서 기다리며 "기꺼이 항복"했기 때문에 인생의 지속성을 더는 파괴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은 <<루신데>>에서 율리우스가 일부러 연인의 죽음을 상상하며 보여 준 슬픔에 대한 감상적 도취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훔볼트의 경우 진실로 큰 슬픔을 주는 일이 일어났을 때, 비탄은 인간의 숙명의 부분으로서 그저 수용되었다. 인간은 행복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불행에 기꺼이 항복함으로써 신성한 힘에 맞서야 했다. 중요한 것은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완수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모든 인간적인 가능성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같은 책, 92-93p)


다시 한 번 지난 몇 년이 대단히 쓰라리게 항의하며 들고일어났다. 여동생 로제가 결혼했을 때 라헬은 자신이 갖지 못한 행복을 자매를 위해 빌어야 했다. 멀리 떨어진 파리에서 라헬은 자신과 자신의 불행에 대한 가족의 경멸을 느꼈다. 그녀의 가족은 그녀의 불행을 순수한 사치 또는 예쁘지 않은 여성의 한심한 불행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같은 책, 100p)


삶을 사랑하기란 외국에 있을 때 수월하다. 아무도 당신을 모르고 홀로 자신의 삶을 손에 쥐고 있을 때, 당신은 어느 때보다 더 자제하게 된다. 국외라는 장소의 불투명성 속에서 자신에 대한 모든 구체적인 참고 사항은 모호해진다. 당신이 불행하다는 일반적 앎이 당신을 수치스럽게 하기 위해 거기 존재하는 것이 아닐 때, 당신에게 반복해서 빛이 부딪혀 초점을 맞춤으로써 당신의 불행이 수많은 거울로 반사되지 않을 때, 불행을 정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된다. 당신이 젊다면 침몰과 망각을 끊임없이 조언하는 순수한 삶의 힘에 쉬이 굴복할 수 있다. 자신의 모든 불행과 "오명에 찬 출생"의 이유가 인식되지도 관찰되지도 않고 중요하지 않을 때는 쉬이 자신을 망각할 수 있다.

"이질성은 좋은 것이다." 깊이 감추고 아무도 되지 않으며 이름을 갖지 않는 것, 무언가를 상기시키는 어떤 것으로도 봉사하지 않는 것, 그래서 실험하도 시도하고 어떤 것들이 여전히 즐거움을 주는지 보는 것, 또 충격을 피하고 허세 부리지 않으며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에 몰입하는 것. (같은 책, 101p)


그녀가 사랑할 자격이 있음을 발견한 보켈만은 세계가 사랑받을 가치가 있음을 발견하도록 그녀를 도왔다. 그녀에게 즐거움을 받아들이는 법을 가르치고, 완벽하게 수동적으로 그야말로 현존하는 사물들의 현실에 감싸이게 함으로써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쳤다. (같은 책, 104p)


삶은 그녀에게서 그녀가 바라던 것과 오래전에 그녀를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절망으로 몰아넣던 것을 앗아 갔다. 그러나 삶은 항상 계속되었다. 그녀는 더는 한때 갈망했던 것을 바랄 수 없었다. 절망은 끝났다. 남은 것은 고통만이 아니었다. 소유의 포기가 남았으며, "삶은 영구성을 위해 준비되지 않는다."라는 통찰이 남았다. 그것은 "단지 죽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불완전한 모든 것, 무엇보다도 우리의 고통스럽게 표류하는 망설임에 의해 증명"되었다. 당연히 그녀는 소유하기를 원했으며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계속 보유하기를 원했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대도 어쨌든 우리의 기분은 변한"다. 당신은 영속성을 위한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인간에게 오래 머물기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인간에게 희망하고 포기하고 바라고 복종하기를 강요한다고 삶을 "꾸짖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살아가는 한, 삶이 옳다. "그렇게 욕망하과 만족하라. 그것이 이 삶의 전부다." (같은 책, 106-107p)


"그것은 아름답기 때문이에요." 세계는 향유될 수 있었다. 그것은 재난을 나누어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세계는 또한 항상 개방된 피난처로 변함없이 남아 있었다. 라헬에게 순수한 즐거움으로 이루어진 행복은 포기를 통해서만 닿을 수 있는 것이었다. 당분간 즐거움은 그녀가 계속 보유하기를 원했던 현실과 그녀에게서 사라져 가는 것을 보도록 강요했던 현실을 대체했다. 인간이 원하는 것과 얻을 수 있는 것을 그저 내주던 행운은 갑자기 그녀에게 무가치하게 느껴졌다. "지상에서 가장 훌륭한 행복은 무수한 박탈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어요." 행복은 삶이 영속성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숨기는, 한정되고 사멸할 운명인 것들만을 줄 수 있다. "신성한 것은 누구도 소유할 수 없다." 즐거움은 신성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 인간이 더불어 살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것을 주었다. 그것은 이미 삶의 유한성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허용된, 그들이 바라지 않았던 것을 바로 삶에게 받은 사람들에게 허용된 "최종적이고 유일한 현실"이었다.

즐거움은 라헬에게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현실을 제공했다. 그녀는 현실이 그녀를 만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눈을 뜨는" 것으로 충분했으며, 그러면 그녀 자신이 "아름다운 세상"에 넋을 잃고 감싸이게 내버려 둘 수 있었다. "행운은 누군가의 앞에 장미 꽃잎을 흩뿌리지 않지만, 만일 행운이 누군가에게 눈을 뜨게 허용한다면 그는 그 풍요로움을 서둘러 인식해야 하고 그 모든 사랑스러움을 넋을 잃고 보아야 한다. 그것이 진실로 사랑스러울 때 인간은 그것을 소유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저 그것이 만개하기를 기다린다. 결국 우리의 모든 눈물과 가장 쓰라린 고통은 소유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향유할 능력 외에는 결코 어떤 것도 소유할 수 없다."

라헬은 아무도 자신을 기다리지 않기를 기도하며 파리에서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자신이 잊혔으리라는 희망으로, 그리하여 자신은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파리에서의 행복을 무심히 계속 추구할 수 있는 새로운 외국으로 가는 것이기를 바라며. (같은 책, 107-108p)


그녀에게 일어난 일은 무력하게 사건에 노출되고 자아의 순수성과 개성의 고결함에 대한 신성모독을 인내해야 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 자신도 다른 사람들만큼 실수를 저질렀다. 그녀는 비열하기도 했고 결국에는 저속했다. 그러면 우르키호와의 상황은 무엇이었던가? 확실히 그것은 처음에만 "대단히 부도덕한 행위"였다. 나중에는 "나는 타인을 사랑을 대해야 한다고 생각한 곳에서 나 자신이 학대당하는 것을 보았어요. …… 그떄까지 나는 타인과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야말로 가장 경멸받을 만하다고 여겼어요. …… 나 자신은 그런 종류의 실수에 책임이 없다고 생각했죠. …… 그런 실수를 한 사람들을 항상 몰래 미워했어요. 심지어 사랑에 있어서도……. 나는 균형 잡힌 판단을 유지했어요. 나는 희망을 가져 본 적이 없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갑자기, 나 또한 그것에 관해서 잘못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 이제 나는 내가 일생 동안 실수했을 수도 있으며, 미래와 과거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요. 이 깨달음이 나를 산산조각내고 있어요." 처음에는 불행이나 불명예보다 훨씬 충격적인 듯했던 이런 통찰력은 자책과 연관됨으로써 그녀를 구원하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마찬가지로 실수 말고는 거의 하는 것이 없는 나머지 인류와 연대를 맺어야 했다. 후회로 말미암아 자신이 평생 실수를 저질렀을지도 모른다고 느끼고, 다른 사람처럼 과거나 미래를 더는 확신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같은 책, 140p)


"이 사실을 참혹한 경험 속에서 위안으로 삼으세요. 살아 있는 목격자로서 당신의 존재를 아는, 그리고 (감히 말하건대) 그 깊이를 보는 피조물이 산다는 것을." 레베카가 말한 모든 비탄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으며, 그보다 더 대단하고 나쁜 것들, "나 자신이 경험한 적 있는 더 대단한 고통"이 존재함을 증명했다. 그녀는 친구에게 인생은 계속된다는 것을 가르쳤다. "당신이 아직 갖지 않은 힘들에 대해 희망을 가져요. 그것은 가장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가능해요." 그녀는 비탄이란 삶이 그것을 모른 체 하고 지나가지 않았다는 증거로 쓰일 수 있음을 지적했다. "슬픔을 경험하는 것은 또한 살아있음을 의미해요." 그리고 인간은 그럼에도 비탄을 사랑해서는 안 되며, 그것을 이미 일어난 일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당신의 비탄을 사랑하지 마요." 어떤 감정도 영원하지 않으며 따라서 매달릴 수 없다는 것, 그럼에도 감정은 순수한 무를 제거하기 대문에 실존의 기초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도. 그러나 그때 인간 존재는 모든 "영광스러운 어리석은 행동"을 견뎌 낼 뿐 아니라 바로 고통을 견딜 수 있기 위해 그것을 찾아낸 것임을. 인간은 "능동적이고 즐거워질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데, 그런 태도만이 "대단하게 견뎌 낸 고통에 연결되어 한 사람의 완전한 존재가 나아가도록 무게를 실어 주기" 때문이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레베카에게 가장 진부한 개념들(젊음은 시간이 있고 기다릴 수 있으며 "우리 마음보다 세계가 더 풍부한 사건들로 이루어"진다는 장점이 있다)을 명심시켰다. 즉 사람이란 비탄과 불행으로 죽기보다 일반적으로 다음 날을 상당히 굳건하게 희망한다는 것("당신은 계속 살아가야 하므로, 진실하게 사세요!"), 그리고 죽음에 대한 희망은 고통의 속임수 중 하나인데 "젊음은 격렬하고 심오하지만 아직 삶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 젊음은 예컨대 가장 잔인한 손실 이후에 반박할 수 없이 남아 있는 모든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유혹적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즐거움은 최악의 상황에서조차 우리에게 밀려들고, 태양은 빛나요! 우리는 고통스러워하고 한탄하죠!"). 그리고 그녀는 레베카에게서 삶과 화해하고 그것을 사랑하기 위한 첫 번째 수줍은 노력을 나타내는 저 유익한 호기심을 일깨우고자 했다. "단지 호기심으로 자기 인생을 경험하며 슬픔과 기쁨을 엿듣는 것은 무의미한가요?" "우리의 이해가 회고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해도" 통찰의 방식과 이해력은 호기심에서 나온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무엇을 붙잡든 태양은 항상 빛나며 우리가 삶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에서 나온 삶에 대한 자발적 복종, 즉 자살의 부정에서 회복된 저 궁극적인 동의가 나온다. "우리가 이해할 때 모든 것이 그러하듯 마지막에 이르러 다시 괜찮아지죠."

절망적인 게임에서 일관성 없는 기억의 조각들로 이끌어 낼 수 있는 결론이나 삶이 가르칠 수 있는 것은, 명백히 측은하고 사소한 것들이었다. 어둡고 뒤족박죽인 채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장면을 향해 소통의 의도를 품고 이성의 빛을 던지자마자, 혼란 속에 놓인 듯했던 아주 근사하고 복잡한 의미는 완전히 사라지고 오래된 격언 중에서도 가장 지루한 것만이 남았다. 그런 빈곤함에서 또한 다른 특정한 사람들과의 연대, 즉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시시함을 타고났다기보다 "오명에 찬 탄생"이 바로 가장 쓰라리고 진부한 경험으로서 그들을 두드러지게 하는 사람들과의 연대만이 구원을 제공했다.

"내가 당신을 위해 고통받게 하세요." 라헬은 친구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이것이 그녀의 교훈, 경고, 소통의 요점이었다. 본보기가 되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본보기가 되었던 것이 필요했다. 라헬의 본보기에서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최소한 한 명은 존재해야 했다. "고통의 극한 속에서 나는 이것을 신에게 부탁했어요. 그리고 신이 그것을 허락한다면 내 영혼을 누그러뜨리겠다고 맹세했죠. 그와 나는 약속을 지켰어요." (같은 책, 142-144p)


그녀에게 소속감을 느끼게 하고 그녀가 반복할 수 있는 말들을 가진 "매개자"를 스스로 발견하지 못한다면 소통하려는 그녀의 시도는 가망 없이 완전히 방향성을 잃은 채로 남아 있을 것이었다. 그녀는 친구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괴테의 말을 들어요. 나는 눈물로 이 매개자의 이름을 써요. 나의 극심한 고통에 대한 기억으로 …… 그를 읽어요. 마치 불운 속에 있는 사람이 성경을 읽듯이." "내 평생 동안 이 시는 반드시 나와 동행할 거예요." 모든 젊은이에게는 그런 동료애와 삶에 대한 지침이 필요하다. 그것들을 삶에 도입하기 위해, 개성을 발전시키기 위해, 그리고 중요한 소수의 위대하고 단순한 사물들을 발견하기 위해. (같은 책, 146-147p)


그녀의 지식, 고통, 기쁨은 그녀와 더불어 사라지겠지만 그 운문들은 사멸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녀를 자신들과 더불어 미래로 데려갈 것이었다. 그리하여 운율은 계속해서 우리의 넋을 잃게 하고, 누구든 우리 뒤에 오는 사람들을 우리가 아는 것을 배울 장소로 우리를 이끌어 주리라. (같은 책, 149p)


시가 가진 일반화의 힘은 그것이 모든 어휘를 진지하게 취해 근원적이고 절대적인 정밀성으로 사용함으로써 발생될 때만 성취된다. 따라서 라헬에게 "괴테가 사용하는 모든 어휘는 희망, 충실함, 공포 등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어휘일지라도 다르게 느껴"졌다. 말하자면 모든 어휘가 처음 발화되는, 시적인 것의 완전히 자유로운 순수성 속에서만 언어는 기꺼이 그녀 자신과 그녀의 전례 없는 인생을 맡길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괴테는 그녀에게 말할 수 있는 언어를 제공했다. 그녀가 시인의 단어를 읽듯 "내 삶도 똑같이 내게 그러는 것 같아요. 항상 나에게는 진정한 의미에서, 즉 피 흘리며 살아 있는 심장에서 낚아채 온 의미에서, 다른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의 말들은 단순히 발생한 일의 말없는 주술에서 거듭 그녀를 자유롭게 했다. 말하는 능력은 그녀에게 이 세계에 망명지를 제공했으며, 사람을 대하는 법과 자신이 들은 것을 신뢰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녀는 자신이 말할 수 있게 해 준 것에 대해 괴테에 감사했다. (같은 책, 149-150p)


자신이 되는 것만이 아니라 독특한 사회적 특징도 가지는 다의성, 단 한 사람이 되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적 삶의 복잡함 속에서 많은 타인과 자연스럽게 서로 엮이는 사람이 되는 것의 다의성, 어머니이자 자식으로 자매이자 연인으로 시민이자 친구로 동시에 존재하는 것의 다의성. (같은 책, 152-153p)


그녀는 사랑은 오직 가끔만 인간의 삶 전체를 보증할 수 있으며 그런 사랑은 예측할 수 없는 행운으로만 온다는 것을 배웠다. (같은 책, 153p)


그녀는 계속 살아가는 사람은 삶을 경멸할 권리, 또는 자기 영혼의 삶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삶을 이용한 권리가 없다는 것을 배웠다. 사람은 삶을 "완두콩처럼 손에" 들고 "완전히 의식하고서" 던져 버렸을 때만, "삶은 별것 아니다"라고 말할 권리를 가진다. 삶은 대단한 것이며 그것을 위해 싸우지 않는 것은 바보스러운 일일 만큼 중요하다. 인간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삶을 고수하고 방어하기 위해 들고일어나야 한다. 단 한 번 사는 그 삶을 낚아채거나 파괴하겠다고 위협하는 외적 세계를 무시하는 것은 자만심의 절정이 될 것이다. 외부 세계 앞에서 완전히 무방비임에도 그토록 터무니 없는 자부심을 가진 주체성의 몸짓은 삶이라는 선물에 대한 감사로 있는 그대로의 삶을 긍정하는 저 궁극적인 동의와 아무 관계가 없었다. 삶을 멀리 던져버리는 것, "이는 누군가가 대단한 대가를 치르고 할 수 있는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무 가치가 없다는 뜻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도난당하게 두는 것, 순간에서 순간으로 인간의 관습(실제로 신성화된 것!)에 의해 빼앗기도록 두는 것은? 이성은 고개를 조아리며 전적으로 동의하고 내 인생의 정수로 마련된 축제에 좋은 소시민의 옷을 입고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가?" (같은 책, 154p)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하나가 되고 사회적 지위가 없는 개인도 참여할 수 있었던, 사회적으로 그 어떤 곳에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에게 천국을 제공했던 살롱은 1806년에 일어난 재난의 희생물이 되었다. 유대인들이 살 수 있었고 "따뜻한 햇볕이 비추는 그의 영토에 자라는 모든 식물을 위한 공간"을 주었던 프리드리히 2세의 시대는 끝났다. 파탄의 시기인 지금에서야 라헬은 자신의 삶 또한 일반적인 정치적 조건들에 종속되어 있음을 이해했다. "지금까지 나는 보호 아래 살았어요. 엄밀히 말하자면 프리드리히 2세의 날개 밑에서. 외부에서 오는 모든 즐거움과 선과 이점 그리고 모든 교제가 그의 영향 덕분이었음을 이제 알게 되었어요. 그 모두가 내 머리 위에서 산산이 부서졌고, 그건 내게 유난히 혹독하게 느껴져요!" 개인적 역사를 통해 사적으로 몇몇 사람과 연결될 가능성은 존재했지만, 거기서 탈출하는 길을 발견할 수 없었던 그녀는 자신을 일반적이고 공적인 운명의 일부로 만들었다. (같은 책, 158p)


철학자에게 "역사, 그리고 역사와 함께 인류는 순환의 춤을 추는 신비롭고 이상한 법칙에 따라 진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정하고 적절한 인간 존재는 기존의 것을 반복하는 동시에 전적으로 새로운 것을 형성하는 시간 속에서 창조적으로 행동함으로써 자신을 만든다." 인간에게 현실 세계를 변화시킬 힘을 주되 "선험적인" 것을 향한 "근본적 추진력"을 아직 박탈하지 않기 위해 피히테는 "우연히 존재하게 된 모습대로 당연히 수동적으로만 취해질 수 있는, 이미 주어진 현존하는 세계"와 "앞으로 다가올 선험적인 것의 세계 그리고 미래에 존재할 것이며 영구히 미래로 남아 있을 세계"를 구분한다. 변경할 수 없이 주어진 세계와 절대적 법칙을 따르며 영구히 미래에 존재할 것이므로 변화가 필요 없는 세계 사이에 인간의 영역이 놓여 있다. (같은 책, 166p)


그 예전 세계의 붕괴는 라헬에게 새로운 세계로 들어갈 기회를 제공했다. 예전 세계는 산산조각 났고, 새로운 세계를 재구성함으로써 모든 전통을 배제하고자 한 피헤테는 라헬에게 "편안함과 희망"이었다. 그에 따르면 다가올 세대는 여전히 살아 있는 이전 세대에게서 분리되어, 교육 기간 동안에 후자의 부패한 영향에서 보호되어야 했다. 피히테는 역사적 연속체, 즉 세대 계승의 기저를 이루는 자연스러운 관계를 파괴할 것을 요구했다. 새로운 세대의 기둥은 출생과 역사로 특권화된 계급이 아닌 전 국민이 될 것이었다. "암울한 감정"이 아니라 "명쾌한 이해"(피히테)가 새로운 사회적 질서의 진정한 기초와 출발점이 될 것이었다. (같은 책, 167p)


그녀는 그의 기분을 북돋아 주었다. "당신은 단지 자주 흔들리는 것 같아요. 당신 주변으로 밀려드는 세계는 형편없이 메말랐고 몹시 창백하며 활력이 없어요." 그녀는 그에게 쓸모 있는 흔한 것을 수용하라고 조언했다. "살고, 사랑하고, 공부하고, 근면해지고, 기회가 온다면 결혼을 하세요. 사소한 모든 것을 중요하고 살아 있게 만드세요. 그건 신뢰할 수 있는 진실한 과정이고 어느 누구도 당신이 그렇게 하는 걸 막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옳았으며, 그는 그녀에게 감사했다. 그는 결국 감수할 준비가 되었다. "이후로 모든 꿈과 영웅적인 장엄함 그리고 세상의 중요성에 대한 욕망을 끝낼 거예요."

그는 진실로 대단한 존재가 되었을까? 세상과 평화 조약을 맺었을까? 아니면 결국 자신의 역겨움에 의해 파괴되지는 않았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란 불가능하다. 해방전쟁이 시작되자 그는 참전했고 그래서 몇 달 동안 최소한 일반적인 열광 속에서 자신의 지루함을 떠내려 보냈다. 1814년에 그는 소규모 접전에 참가했다. 아직 젊었기 때문에 동시대인들의 기억 속에 편지 몇 통과 감명만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라헬과 마르비츠의 우정은 모든 사람에 대항한 동맹을 연상시킨다. (같은 책, 204p)


그녀는 결국 마르비츠에게서 몇 가지를 배웠다. 자신의 비관계성과 이질성을 객관적으로 보고, 그것들을 너무나 가난하고 내용이 빈약해 그녀를 흡수하여 동화시킬 힘이 업슨 도시의 공허함과 결핍에 끼워 맞추는 법을 배웠다. 그녀의 절망은 더는 그녀 자신의 사적인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불운한 세계의 단순한 반영이었다. 이는 마르비츠가 그 자신의 절망과 역겨움을 그 안에서 보았던 빛이었다. 그리고 그는 옳았다. 그가 속한 세계는 진실로 흔들리고 있었으며 붕괴하려는 참이었다. 라헬은 자신의 소외를 그에 맞춰 해석했고, 그것이 일반적인 범주, 그 자체로 삶인 그 세계에서만 이해되는 불가해한 추상적인 운명에 의해 가해졌다고는 더는 믿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마르비츠처럼 그것을 역사가 불운한 세계로 할당한 잘못된 장소에 태어났다는 구체적인 불운으로 보았다. (같은 책, 212p)


삶이 지나가고, 그것을 알기도 전에 젊음은 사라지고 노년이 바로 앞에 있다. 라헬은 40세가 되었고 아무런 성공도 이루지 못했다. 유대교에서 벗어나기를 원했지만 그 안에 남아 있었고, 결혼하기를 원했지만 점점 더 가난해졌다. 세상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고자 했으나 젊은 시절 다가온 몇 안 되는 기회를 놓쳤다. 사회는 그녀에게 "삶의 절반"이 되었고, 그녀가 성취하는 데 거의 성공한 유일한 것은 사회에 대한 타당한 역겨움이었다. (같은 책, 222p)


부유하지는 않더라도 경제적 안정이 동화의 첫째가는 그리고 필수불가결한 선결 조건임은 모든 유대인이 아는 바였다. 그러나 라헬만큼 명확하고 용감하게 그것을 표현한 사람은 드물었다. 가난의 대가가 고독임은 그녀에게 잔인한 명확성으로 입증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역시 그녀는 "나 자신을 끔찍한 상황으로 던져 넣을 용기"가 늘 부족했다. 그녀의 고단한 삶에 유일한 기초가 된 것은 경제적 안정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그녀는 재산이 충분했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는 유언장을 남기지 않았고, 이후 그녀는 계속해서 남동생들의 선의에 의존했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소유했는지 결코 알지 못했고, 고정되지 않고 사업의 상태에 좌우되는 돈을 받았따. 늘 먹고 살 만은 했지만 1807년 이후에는 동료들보다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따라서 보통의 부유함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사회에서 지위를 유지하기 우해 부가 필요했던 바로 그 시점에, 라헬은 그 어느 때보다 알뜰하게 살아야 했다. 모든 사람들이 즐겨 찾았으며 전통의 결여가 그 자체로 매력적이었기에 예거스트 라세의 작은 다락방에서 모두를 볼 수 있던 시절, 그런 날들은 확실히 가 버렸다. 높은 지위의 대안으로 점점 더 많은 부가 요구되었다.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 라헬은 이제 사회가 자신에게 열어 놓은 아주 작은 틈으로 몰래 살금살금 들어가야 했다. 계속해서 자신의 재력을 넘어서는 생활을 해야 했으며, 더는 자신이 아닌 존재처럼 보여야 했다. "누군가가 높은 지위, 명성, 재능, 미모를 갖추지 못했다면, 그는 반드시 부유함을 가져야 한다. 나는 부유한가? 그런 적이 있었던가? 그것이 바로 어머니의 죽음[1809년] 이후 그토록 적은 수의 사람을 만난 이유 중 하나였다. 이것들은 이미 상실되었고, 단지 내가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나는 그 부족을 느끼고 있다. 그렇다, 나는 내가 사랑한 모든 것의 결핍을 느낀다. 개인적 자유와 (자주 나의 제한된 환경에 한정되었던) 편안함을 제외하고. 그리고 나는 꽤 많은 것을 사랑한다." 돈이 부족했기에 그녀는 다시 한 번 가족과 남동생들의 사업상 친구들로 한정된 테두리에 의존했다. 그 변화는 그녀의 편지에서 즉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녀는 이제 거의 유대인들과만 편지를 주고받았다. 파른하겐과 마르비츠가 유일한 예외였다. 

동화는 부유한 유대인들에게만 존재했다. 나머지는 그들 역시 부유한 계급으로 상승해서 이미 동화된 유대인에 동화될 때만 유럽 공중의 가시 범위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만화 속의 등장인물, 캐리커처, 가장 저속한 종류의 반유대주의의 대상으로만 알려졌다. 성공한 유대교 신자의 눈에 가난한 유대인 대중은 이미 자선 활동의 대상에 불과했고, 반유대주의를 자극하는 위험하고 유감스러운 이들을 개혁함으로써 제거하는 것이 그 궁극적 목적인 기껏해야 개혁적인 노력의 대상이었다. (같은 책, 224-225p)


사회적 고립이 기정사실이 되고서야 유대인 인텔리겐치아는 혁명적인 운동과 동맹을 맺었다. (같은 책, 227p)


1809년에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사이에서 발발한 새로운 전쟁은 프로이센의 수동성에 절망한 독일 애국자들만을 징병 소집한 것이 아니었다. 가난해진 젊은이들, 규모가 축소되고 정치적으로 파멸한 프로이센에서 발전의 더 나은 가능성을 보지 못하는 젊은이들 역시 매력을 느꼈다. 그들에게 전쟁은 여전히 획득의 기회를 제공해 준 하나의 복권이었다. 아슈페른Aspern 전투의 승리 후에 그들은 쉽게 그리고 의도적으로 오스트리아의 신병 모집 노력에 굴복했다. (같은 책, 231p)


다르게 말하자면 그녀에게는 결정하기가 너무 어려웠던, 계속 살아가는 것은 결국 가치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잠시였지만 만사가 원활했으므로 그녀는 진실로 결국 모든 것을 넘어 삶이 여전히 얼마나 멋지며 사랑할 만한지를 인식할 수 있었다. (같은 책, 242p)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녀는 자신이 다른 사람과 같음을 다른 모두에게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사람이 그에 대해 언급하도록 과장되게 굴어야 했다. 바삐 움직이고 철저해야 했고 우리가 독일에서 한 세기 동안 가장 풍부한 학습 기회를 가졌던 그런 철저함을 소유해야 했다. 그녀가 자신의 시기 이후의 모든 박애주의적 숙녀들과 똑같이 혐오스럽게 행동하는 것을 보는 것은 실로 흥미로운 일이다. 가장 사소한 구실로 모든 것을 준비하고, 모든 선행에 울음을 터뜨리고, 군인들 하나하나를 모두 영웅으로 숭배하면서. 또 그런 모든 숙녀와 마찬가지로, 그녀 자신의 경험에 대한 과대평가와 과소평가, 사실상의 무지에서 그리고 역사를 이루는 모든 객관적 요소에서 탄생한 똑같이 유아적인 평화주의적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면서. "나는 전쟁에 동조하기를 거부하는 모든 유럽 여성에게 진실한 마음으로 호소하고 고통받는 모든 사람을 공동으로 도울 멋진 계획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고 나서 우리는 적어도 한쪽에서 평온하게 있을 수 있어요. 우리 여성들 말이에요. 그런 거라면 통하지 않을까요?"

그녀는 자신의 도움이 친절하게 허용되고 또 기다림과 구경꾼 역할을 멈추고 무언가를 했다는 데서 오는 열광적인 즐거움으로 인해 완전히 진부하고 어리석어졌다. "재산이나 지위, 젊음, 명성, 재능이 없어서 가깝고 중요한 사람들에게서 버림받은 나는 세상에서 내 자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기뻐하고 있어요." (같은 책, 242-243p)


"다른 상황이었다면 내가 만나기를 바라지 않았을 사람에게서 느끼는 입에 담기도 싫은 극도의 짜증." 어떤 상황에서도 벼락출세자가 스스로 인정할 수 없는 "모든 통찰과 견해가 가진 대단한 독"은 이것이었다. 자신이 진실로 원하지조차 않았으면서 거절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많은 것에 갉아먹히고 있었다는 점, 자신의 취향과 삶과 욕망을 그런 것들에 맞추어야 했다는 점, 어떤 것에서도 단 한순간도 더는 자신이 될 엄두를 내지 않았다는 점. 그는 중요한 것, 다른 어떤 것이 되어야 했고 모든 것을 이루기를 원해야 했으며 자신이 "만들지 않은" 심지어 "경멸한 것"을 영웅적으로 "참아"야 했다. (같은 책, 254p)


"우리는 이 세상에서 진실한 삶을 살기 위해 창조되었어요. …… 우리는 인간 사회와 나란히 존재해요. 우리에겐 장소도 사무실도 텅 빈 직함도 존재하지 않아요! 모든 거짓말은 자리를 가지고 있어요. 영원한 진실, 올바로 살아가는 것과 느끼는 것은…… 자리를 갖고 있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사회에서 배제되었어요. 당신은 그것을 위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나는 죄를 지울 수 없고 그것에 덧붙여 거짓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진실을 포기함으로써 벼락출세자가 되는 대가를 치러야 했으며, 라헬은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같은 책, 254-255p)


"나는 항상 비참한 상황들로 뛰어들 용기가 부족했어요. 그것이 내가…… 경멸했던 것을 견뎌낸 이유예요. 그것이 내가 아픈 이유예요." (같은 책, 262p)


"상상해 봐, 여기서 우리는 가정부에게 유대인 두 명이 여기 우물들에 독을 넣었다고 들었어. …… 나는 결국 평화를 원한단다. 정말로." 1831년 콜레라가 베를린을 휩쓸던 시기에 그녀는 남동생에게 그렇게 편지를 썼다. (같은 책, 27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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