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에게도 강요해서 편지를 써두었으니까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함께 읽으면 재밌을 것 같아.
엄마는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그런지 어떻게 1년이 지나갔는지 모르겠어. 네가 태어난 이후로 너 사진을 찍지 않은 날이 없는데, 그렇게 사진들을 돌아보면서 그때의 감정을 되새겨 보곤 해. 너의 웃는 얼굴을 볼 때면 힘들었던 기억이 자꾸 사라져서 주변 사람들에게 '육아할만해!'라고 말하지만, 네가 유독 많이 울었던 날의 사진을 보면 분명 힘든 순간들도 많았음을 다시 떠올려.
그럼에도 엄마는 1년 동안 그렇게 힘들지 않았어. 무엇보다 네가 너무 착하고 예쁜 아기였고, 한 번도 크게 아프지 않았고, 아빠를 비롯한 많은 가족들과 친구들이 엄마와 함께 해주었기 때문이야.
아빠는 타인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고 나서는 것도 좋아하지 않지만, 너에게 만큼은 모든 것이 예외야. 너의 일이라면 아주 사소한 것 하나까지 알고 싶어해. 아빠가 너를 웃게 하기위해 하는 행동들을 아빠 친구들이나 동료들이 본다면 깜짝 놀랄 거야.
너의 하나뿐인 이모는 차로 1시간 거리에 살면서도 너를 보기 위해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왔고, 때로는 너를 맡아주고 엄마와 아빠가 데이트를 할 수 있게 해 주었어.
외할머니는 아픈 몸으로, 엄마가 조리원 퇴소 후 집에 왔을 때 열흘 동안 같이 지내면서 너를 돌보았고. 외할아버지는 모든 배경화면을 네 사진으로 바꾸고, 너에게 맞춤 선물을 준비하시기도 했어.
친할머니 할아버지는 항상 최고의 리액션으로 네가 모든 아기 중 가장 예쁘다고 말씀해 주셔서 통화할 때마다 엄마 마음이 뿌듯해져.
증조할머니들은 제대로 걷지 못하시고 밥도 잘 드시지 못하시면서도, 네가 살이 빠진 것 같다며 걱정하고, 걸음마를 떼려고 하면 그 누구보다 기뻐하셔. 원주에 계시는 증조할머니, 할아버지는 너를 너무 만나고 싶어 하지만, 혹여나 코로나를 옮기게 될까 봐 무서워서 사진과 영상으로 보고 싶은 마음을 참고 계시지.
엄마의 친구들은 너 사진을 볼 때마다 너무 예쁘다면서 선물을 이것저것 챙겨 오기도 하고, 세상 신나게 놀아주기도 했어.
엄마가 그나마 힘들었던 때를 꼽는다면, 내가 좋은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마주할 때야. 생후 2주 경 태열이 처음 올랐을 때 신생아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증상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매운 음식을 먹어서 그런가 하며 죄책감을 가졌어. 그 이후 아토피라고 진단을 받을 정도로 피부가 안 좋아졌을 땐 아토피를 가진 내 탓인 것 같아서, 네 얼굴만 보면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기도 했어. 몸무게가 평균보다 낮다는 결과를 받았을 땐 내 모유가 영양가가 없어서 그런 걸까 하는 생각을 했고, 밥을 잘 먹지 않을 때는 내 부족한 요리 실력을 탓하기도 했어.
특히 지난주에는, 산책을 하다 네가 울어서 한참 안아주다가 힘들어서 잠시 유모차에 내려놓았는데 그 사이 벨트를 하지 않은 네가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고꾸라졌어. 다행히 엄마가 몸으로 받아냈지만, 완벽히 받아내지 못해서 바닥에 이마를 찧었단다. 세게 떨어진 건 아니었지만 지극히 엄마의 부주의로 일어난 사고라 너무 놀라고 미안했어. 그날은 네가 잠에 들기 전까지 계속 미안하다고 말했어. 미안한 마음에 사죄를 해서 용서를 받으려는 게 아니라, 앞으로 다시는 내 실수로 너를 다치게 하지 않겠다는 다짐에 더 가까웠어.
너의 이름은, 너를 만나기도 전에 할머니가 지어두셨던 이름이야. 할머니는 아들만 둘이라 딸을 낳으면 지으려고 했던 이름을 너에게 주셨어. 항상 슬기롭고 아름답게 자라라는 의미로 이름을 지어주셨고 엄마는 거기에 그럴듯한 한자 뜻을 붙였어. 큰 거문고를 연주한다는 의미로, 타고난 재능을 펼쳐 행복하게 살라는 뜻을 담았어. 엄마 아빠는 네가 스스로 잘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아는 슬기로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고,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즐기면서 사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그저,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해.
엄마는 너를 만나고 나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많이 발견하게 됐어. 엄마는 귀여운 인형과 장난감 모으는 것을 좋아하는데, 너는 조명이 나오는 장난감을 특히 좋아하더라. 그래서 엄마도 조명이 나오는 장난감을 더 찾아보고 모으게 됐어. 너를 만나 휴직을 하게 되면서 재밌는 전시나 샵도 구경할 수 있게 되었고. 너를 키우면서 든 생각들을 모아서 난생처음 에세이도 써봤어. 덕분에 조회수 100만도 찍어보았고 책을 내서 인기 작가가 되는 삶을 꿈꿔보기도 했어. 1년 동안 이것저것을 해보면서 '아, 내가 원한 삶은 이런 것이었구나'를 깨달았어.
사람이 살면서 아기를 꼭 낳아볼 필욘 없지만, 너를 만난 것은 내 인생에 필연이었어. 아빠와 항상 네가 없었음 뭐하고 살았을까 이야기한단다. 할머니가 너를 두고 '내 삶의 희망'이라고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고 너를 가진 것이 할머니에게 최고의 선물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고. 내 모든 일상의 초점이 너에게 맞춰져 있는 것을 보면 '누군가에게 유일한 존재가 되는 것'에 대해 경외심과 감사한 마음을 갖게 돼.
스스로가 참 보잘것없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느낀 적이 많았는데 너를 만난 이후로 생각보다 나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내가 이토록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 사랑받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이 신기했고. 그만큼 내가 굳건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되었어. 너를 사랑하면서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기도 했지. 그리고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너뿐일 거야.
누군가 엄마에게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언제였느냐고 묻는다면, 엊그저께 날씨 좋은 가을 오후에, 너의 방에서 손을 맞잡고 누워있던 때라고 말할 거야. 언젠가 살아가기 힘든 때가 온다면 나는 그때의 평화로움과 행복감을 떠올리면서, 그렇게 버티게 되겠지. 엄마는 너를 키우면서 힘들어서 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네가 나에게 와준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떠올리면 금방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른단다.
누군가가 이런 얘기를 했어. '내 남은 삶에, 딸에게 내가 전부인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요? 우리 딸은 앞으로 나보다 좋은 것들이 많이 생길 테지만, 나는 죽을 때까지 내 딸보다 좋은 것이 없을 텐데.'
지금은 엄마가 어딜 가든 졸졸 따라오고 안아주지 않으면 곧잘 우는 아기지만, 너 역시 엄마보다 좋아하는 것들이 생기게 되겠지? 엄마는 네가 좋아하는 것, 사랑하는 것들이 많이 생겨서 충만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 엄마도 앞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열심히 찾아 나설 테지만, 아무리 해도 너보다 좋은 것은 찾을 수 없을 거야. 네가 어디로 가든, 무엇을 하든, 어떤 것을 좋아하든 항상 너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잊지 말고 나아갔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