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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아이를 기르다, 나를 기르다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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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아리 Apr 01. 2022

나쁜 어른은 되고 싶지 않아서

부끄럽게도 아이를 낳기 전, 나는 나쁜 어른이었다.

누군가 '아기 좋아해?'라고 물으면 '그렇게 좋아하진 않는다'고 답하곤 했다.

어린애들은 지나치게 솔직하고, 가끔은 무례하고, 버릇없다. 비단 내가 어릴 때 교회에서 어린 남자애들이 '누나 못생겼어'라고 말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식당에서, 지하철 안에서, 마트에서. 어디서든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리고, 제대로 보지 않고 뛰어다니다 건들기도 하며 직간접적 피해를 주었으니까.

아이를 낳고 나니,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사실 아이 낳기 전, 조카를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내 품에 쏙 안기는 작고 따뜻한 존재.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고 우리가 먹고 재워줘야 하는 나약한 존재.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도, 하지도 못하는 미약한 존재. 그래서 보호해주고 싶고 가르쳐주고 싶고,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앞으로 쭉 옆에 있고 싶은 그런 소중한 존재. 어리석게도 내가 어린 아기를 돌보는 입장이 되어서야, 어린이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스스로 '어린아이들과 잘 놀아주는 사람'이 된 것이라 착각했다. 온종일 아이만 보고, 무얼 원하는지 간파하며, 울부짖기 전에 니즈를 충족시켜주고자 내 온 신경을 쏟고 있었으니. '아기 그렇게 좋아하진 않아'라고 답하던 나, 어린이만 보면 어찌할 바를 모르던 나는 이제 없고, 능숙한 어른이 되었다고 자만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집콕만 하다가, 날이 많이 좋아져 아이와 산책을 하게 됐다. 작년 봄에는 유아차에 태우고 나 혼자 사색을 즐기며 걷는, 나의 산책이었다. 올해 봄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를 데리고 아이가 만족할 때까지 바깥세상을 구경해야 하는, 온전히 아이만을 위한 산책이 되었다.

조심성 많은 우리 아기는 어디든 함부로 달려가진 않았지만 본인이 가고자 하는 길은 반드시 가야 한다. 처음 보는 놀이기구는 절대 바로 타지 않고 며칠에 거쳐 관찰에 관찰을 하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탑승하곤 한다.

사람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 아무리 먼저 다가오는 친구가 있어도 쉽게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다. 충분히 믿고 함께 놀 수 있겠단 판단이 들었을 때만 손을 잡거나 따라간다.

무릎이 까매지도록 놀이터를 탐색한 날

지난주에는 처음 보는 오빠가 다가왔다. 할머니와 하원 후 놀이터에 들른 그 아이는, 놀이터에서 조용히 탐색 중이던 우리에게 다가왔다. 우리 둘 다 눈길도 주지 않았지만 그 아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다섯 살이고요. 여기 25층에 살아요. 저기 유치원에 다녀요."

아이가 난간에서 떨어질까 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나는 뭐라도 대꾸는 해줘야 할 것 같았다.

"슬아야, 오빠야는 25층에 산대. 저기 유치원에 다닌대. 우리 슬아는 어디 다니지?"

"저기 있는 어린이집 다니는 거 아녜요? 가방 들고 있잖아요."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대화해야지'라는 생각에 말도 제대로 못 하는 18개월짜리 아이에게 오빠와의 대화를 넘겼지만, 5살 오빠는 나와 대화하고 싶었나 보다.

"저는 여기도 올라갈 수 있어요. 자전거도 탈 수 있고요. 이것 좀 보세요."

주변에 같이 놀 아이가 하나도 없어서인지 그 아이는 내 주변을 계속 맴돌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뽐냈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디로 떨어질지 모르는 우리 아기를 돌보느라 제대로 대꾸를 해주지 못했다. 그렇게 어색한 각자의 대화가 끝나고 나는 도망치듯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를 키우면서는 별 일 아닌 일들이 별 일이 되곤 한다. 집에 와서 아이와 놀아줄 때, 혼자 샤워를 할 때, 자려고 누웠을 때 그 아이 생각이 났다. 주변에 같이 놀 친구도 없었는데, 내가 너무 매몰차게 군 걸까? 우리 아이만 쳐다보지 말고 그 아이 눈도 바라봐주면서 같이 대화를 했어야 했던 걸까? 좀 더 다정하게 맞장구를 쳐줄 순 없었을까. 스스로 못난, 나쁜 어른이 된 것 같아서 마음에 계속 걸렸다.

하필이면 그 시점에 책을 읽었다. 김소영 작가의 <어린이라는 세계>. 오랜 시간 독서교실을 운영하며 마주한 '어린이라는 세계'를 에세이로 담아낸 책이다. 그 책을 읽고 다짐했다. 멋진 어른까진 되지 못해도 나쁜 어른은 되지 말자. 내가 어린이를 대하는 태도가, 곧 우리 아이가 어디선가 받을 시선이 될 것이니. 내가 어린이에게 던지는 한 마디가, 훗날 우리 아이가 받게 될 한 마디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내 모든 과거가 부끄럽고 후회스러웠다.

우리 모두 어린이라는 세계를 거쳐서 지금의 나의 세계를 만들었지만, 우리는 곧잘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잊어버린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순간, 아주 별 거 아닌 순간에 어린 시절의 한 조각으로 말미암아 나아간다. 그러면서도 어린이라는 세계를 이해해주지 못하고 어른의 잣대로만 어린이를 평가한다.

이번 주, 또 나는 놀이터에서 어린 친구들을 잔뜩 만났다. 이번에는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8살 언니였다. 멀리서부터 우리 아이를 보고 달려와 "너무 예쁘게 생겼다"며 웃어 보였다. 이름을 묻더니 이름까지 예쁘다고 칭찬도 해주었다. 혼자 놀고 있어서 잠시 마스크를 벗기고 있었는데 "왜 마스크를 안 씌우세요? 요즘 코로나가 얼마나 무서운데요. 꼭 마스크를 써야 해요."라며 잔소리도 잊지 않았다. 허겁지겁 마스크를 씌우자 안심했는지 우리 아이 머리를 쓰다듬고 손을 잡아주었다. 나에게 같이 놀아도 되냐고 묻고 허락을 득한 뒤 아이를 데리고 놀이기구로 올라갔다. 매사 조심스러웠던 우리 아이도 친절하고 똘똘하며 당찬 언니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평소와 다르게 졸졸 언니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