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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의 무게감

김수달이 김수습이던 시절

by 김수달

지시는 내가 할게 보고서는 누가 쓸래

보고서를 쓴다는 건 누군가로부터 지시를 받았단 소리다. 당연하게도 김수달은 보고 받는 입장보단 보고 하는 입장이 더 많았다. 지금까지 숱하게 보고서를 써왔단 소리다.


생기 가득한 수습 시절 김수달은 "아 이거 누가 맡아 처리하지?"라며 살피는 상사 눈을 꼿꼿이 맞추던 그런 녀석이었다. 수달은 첫 보고를 잊지 못한다. 짐짓 '실력 발휘 한번 해볼까'로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결과는 탈탈 털린 멘탈과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김수달이었다. 본인이 쓴 문장에 들어간 단어 뜻도 제대로 답을 못했으니 뭐.. 추가 질문엔 얼굴만 붉힐 뿐이었다.


보고서의 무게감

보고서는 논술시험이 아니다. 그럴싸한 단어와 아름다운 절충안으로 맺어져선 안 됐고, '제 생각에 그럴 것 같아서', '참고자료에 있는 거 가져온건데'라는 작성 근거를 입 밖으로 내선 안된다. 조사(을/를, 에서, 에게, 부터, 까지 처럼 명사나 부사에 붙어 문법 관계를 맺어주는 품사) 하나에도 '왜'라는 물음에 자신있게 답할 수 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게...' 점 세 개 정도의 정적은 용납되지 않았다. A4용지 한 장의 무게감으로 보고에 임했으니 베테랑 과장님 질문 한방에 훅 불려 날아갈 만했던 것이다.

수달이는 두 번째 질문에는 대답을 잘 못하네

조언 듣고 더 힘빠짐

당시 과장님이 기억에 남을 두 가지 말씀을 주셨는데, 그중 하나가 보고서 작성자는 모든 단어에 대해 왜 그 단어를 썼는지 완벽하게 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숨 막히는 조언이다. 직장생활은 길고 멀기에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수달 경험상 참고자료나 전임자 자료에 있는 문장, 단어를 별 생각없이 긁어올 때를 조심해야 한다. 내가 짜낸 문장은 비루해 보여도 고민의 과정을 답할 수 있지만, 긁어온 단어와 문장은 고민의 과정이 생략된 경우가 많아 잘 대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딱딱한 공무원들

딱딱한 공무원들 같으니라고... 공무원 이래서 문제라니까. 고리타분하게 일하니까 그 모양이지. 그깟 단어 하나가 뭐 얼마나 대수라고!


맞는 말, 보고서는 일 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수단이 목표를 대신해선 안 되는 법이다. 모든 업무에 보고서가 중요한 건 아니다. 대부분의 업무는 비문이 들어가도 진행에 문제가 없을 거라 본다. 문서 편집이나 신경 쓰며 끙끙댈 일이 아니란 소리.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데 아주아주 작은 경우라도 '선택'이 필요한 정책적 상황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 단어 한 단어가 매우 중요해진다. A라는 서비스를 주민들에게 제공키로 하면서 그 조건으로 a, b라는 자격을 갖췄는지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검토보고서를 작성한다고 하자. "a, b조건 충족 시 A 제공"이라 작성했다면 상사에게 한 소리 들을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할 거다.


a와 b를 모두 갖춰야 A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것인지, a나 b 중 하나만 갖춰도 A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것인지 표현만으로는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깔끔하게 보고서를 쓴다고 콤마로 연결할 문제가 아니란 소리다. 딱딱한 표현이겠지만 "a 또는 b 자격을 갖춘 대상자에게 A 서비스 제공"이라고 해놔야 비로소 명확해지는 것이다. 완벽하게 이해하고, 정확하게 보고서를 써야 되는 이유다.

생각보다 쉽지 않죠

그리고 "왜 두 조건을 모두 갖춘 사람이 아니라 둘 중 하나만 갖춰도 A 서비스를 제공해야 되지?"라는 추가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관련된 통계든 논리든 근거가 갖춰져 있어야 그 보고서는 과장을 넘어 실국장 보고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 두-세 단계 추가 질문이 들어와도 막힘 없이 답할 수 있도록 준비가 되야 한다는 것이다. 100장의 무게를 지닌 한 장짜리 보고서여야 한다.


전임자의 피땀 눈물 어린 보고서

그야말로 딱딱한 얘기다. 팁 공유하듯 썼지만 김수달도 한참 멀었다. 보고서 하나를 쓸려면 관련된 자료 공부도 많이 해야 되는데 성격이 급해 자판부터 두들기고 보기 때문이다. 문서 창을 열어 여백을 몇 분 동안 응시하노라면 한숨이 나온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전임자 폴더를 열어본다. 비슷한 자료를 본 거 같은데 하면서... 기어이 한 두 개 자료를 찾아내고 여백의 문서 창 옆에 함께 열어둔다. 드래그 앤 드롭이 시작된다.


직장생활 5년 동안 자신 있게 쓴 보고서가 거의 없다. 무식해서 용감했던 그때는 막 써내려 갔었는데, 지금은 워딩 민감도만 높아져선 주야장천 보고서만 고쳐 쓰고 있는 김수달이다. 좋은 보고서는 중학생 조카가 읽어도 이해가 돼야 한다는데, 그런 보고서를 써본 적 없는 것 같아 시무룩하다.


보고서가 일기는 아니죠

까여도 보고 머리도 쥐어 뜯어보며 깨달은 것도 있다. 보고서는 내가 보기 좋으라고 쓰는 서브노트가 아니라는 거다. 다른 사람(대부분 나보다 높은 사람이라는 서글픈 사실)이 볼 글이란 거다. 나도 이해 못하는 글을 남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그 사람은 김수달 같은 사람 십여 명의 일을 결정하고 판단을 내려야 되는 사람. "그래서 어쩌란 말이야"란 말풍선이 뜨게 해선 안된다. 우리 상사를 조카라 생각하고 친절하게 알려주는 보고서를 쓰도록 노력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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