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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짐꾼의 목장 Mar 20. 2021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

나는 대부분의 어린 시절(70년대)을 시골에서 보냈다. 대문 밖을 나가면 바로 논밭이 펼쳐졌고 조금만 걸어 나가면 냇가에서 천렵질을 할 수 있었다. 산에 가면 나무와 덤불들이 내 아지트였고, 벙커였다. 놀다 허기지면 칡뿌리를 캐 단물을 빨거나 밤송이를 주워 까먹었다. 게임기 같은 것들이 있을 리 없었고, 따로 장난감이 필요 없었다. 동네 빈 터에 금만 그어 놓으면 축구장이 되고, 야구장이 됐다. 과외공부 같은 건 생각도 못했다. 그저 학교만 갔다 오면 마루에 가방을 내팽개치고 나가서 날이 저물어서야 새카맣게 되어 집에 들어왔다.


지금도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으면 금방 내가 자란 마을의 전경이 펼쳐진다. 철마다 들꽃들이 지천으로 피고, 논두렁엔 개나리가 노랗게 덮였다. 추수 때면 동네 어귀 키 큰 포플라 나무들이 노오란 들판 위로 바람에 슬렁슬렁 흔들린다. 아이들 어깨 높이만큼밖에 안 되는 담장 안으로 보이는 마당에 솥을 걸고 무언가를 삶고 있는 아주머니가 보인다. 바람 드는 대청마루 속으로 한지를 더덕더덕 덧댄 창호문이 삐끔히 열려 있고 나만 보면 이유 없이 호통을 치던 영감님이 목침을 베고 코를 골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누렁개가 배를 깔고 잠들어 있는 마당 한편에 제사 때 쓸 막걸리를 만든다고 찐 밥을 널어 말리는 노파의 굽은 등도, 모락모락 연기가 오르는 어느 집 굴뚝 아래로 고소한 밥 타는 냄새도. 밭일하고 들어온 신랑의 벌건 등짝에 철썩철썩 펌프 물을 끼얹는 젊은 새댁의 뒷모습도 눈감은 망막 뒤로 맺힌다. 거의 50년이 다 되어 가는 모습들이지만 피어오르는 기억의 그림들은 마치 어제 일이었는 양 또렷하기만 하다. 윤동주 님의 시 한 편은 마치 내 기억의 한 조각을 그림으로 펼쳐낸 듯만 하다.


산골작이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몽기몽기 웨인연기 대낮에 솟나

감자를 굽는 게지 총각애들이

깜박깜박 검은 눈이 모여 앉아서

입술에 꺼멓게 숯을 바르고

옛이야기 한 커리에 감자 하나씩

산골작이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살랑살랑 솟아나네 감자 굽는 내


굴뚝 - 윤동주


사진출처: 서울특별시 교육청


내 어릴 적의 기억들, 그중에서도 특히 그리운 기억들은 대부분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무언가를 같이 먹고, 나누던 것들이다. 사냥(?)은 꼬맹이들의 중요한 놀거리 중 하나였는데 토끼, 꿩, 개구리, 메뚜기, 참새, 미꾸라지, 가재 등등이 어린 녀석들의 손에 어렵지 않게 잡혔던 것을 보면 지금과 비교해서 환경이 깨끗했던 그때만 해도 야생동물들이 참 흔했다.


가을 추수가 끝나고 날씨가 서늘해지면 그 시끄럽던 개구리들이 자취를 감춘다. 이때 물 빠진 논은 동면하기 직전의 살찐 개구리들을 잡기에 좋은 장소였다. 특별한 사냥도구도 필요 없었다. 그저 개구리 담을 깡통과 논둑을 파 낼 삽자루 하나만 있으면 충분했다. 논둑에 뱀 구멍보다는 작고 개미구멍보다는 조금 큰 구멍들이 보이면 삽으로 언저리를 푹 파 낸다. 그러면 반쯤 잠든 어른 주먹만 한 통통한 개구리들이 도망도 가지 못하고 쉽게 잡혔다. 이 녀석들을 다리만 떼어 내어 깡통에 담는다. 반나절만 논두렁을 돌면 꼬맹이들의 깡통은 개구리 뒷다리로 가득 찼다. 개구리 뒷다리 껍질을 벗겨 내고 불에 살살 구워 소금에 찍어 먹으면 세상에 그보다 맛있는 것이 없었다. 꼬맹이들의 개구리 사냥은 첫서리가 내려 땅이 얼기 전까지 계속됐는데 그쯤 되면 녀석들의 빨간 볼엔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우린 그 볼살을 꼬집으며 '개구리살'이라고 불렀다.


조금 더 머리가 큰 녀석들은 토끼나 꿩을 잡았다. 토끼는 무밭이나 배추밭에 내려와 농사를 망치는 나쁜 놈들이어서 얼마든지 잡아도 되었다. 토끼몰이는 온 동네 어른들이 하루 날을 잡아 모조리 소탕할 때도 있었지만 어린 녀석들은 그럴 깜냥이 못 되어 올가미(덫)를 놓는 방법으로 토끼를 잡았다.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산에 토끼똥이 떨어져 있는 길목에 철사로 올가미를 만들어 놓기만 하면 되었다. 토끼란 녀석들이 의외로 머리가 나빠서 자기들이 다니는 길에서 올가미에 목이 걸려도 뒷걸음질을 치지 못하고 그저 앞으로, 앞으로 헛발질만 하다가 결국은 목이 졸려서 죽었다. 우리는 하루 이틀 지난 뒤에 올가미 놓은 곳으로 가서 죽은 토끼를 가져오기만 하면 되었다. 어떨 때는 다른 산짐승에게 다 뜯어 먹히고 난 토끼를 땅에 묻어 주고 올 때도 있었다.


지금도 포장마차에 참새구이를 파는지 모르겠지만 눈 오는 날은 참새 잡는 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눈이 하얗게 내렸으면 우리들은 얼른 집에서 묵어 쩐내 나는 곡식 한 바가지씩을 들고 나온다. 눈 위에 멍석을 깔고 그 위에 낱알들을 뿌린 후 커다란 널빤지 한 장을 줄을 맨 작대기 두 개에 괴어 놓기만 하면 되었다. 그리고 한두 시간 신나게 놀면 눈 온 날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한 배고픈 참새들이 거기에 다 모였다. 아마 우리 동네 참새들이 전부 왔다고 해도 될 만큼 멍석 위에 참새들이 많았다. 골목대장 격인 녀석이 줄을 당기는 거사를 책임진다. 줄을 당기면 멍석 위에서 낱알 쪼아 먹느라 정신없는 녀석들 위로 널빤지가 떨어지고 (반 이상은 도망간다) 우리는 가서 널빤지를 지근지근 밟아 주었다. 그렇게 수확한 참새를 뜨거운 물에 넣어 털을 뽑고 배를 갈라 내장을 뺀 후 쇠꼬챙이에 주욱 꿰어 불에 구우면 동네 여자 아이들이 '한 마리만, 한 마리만' 하며 남자아이들을 쫓아다녔다. 나중에 커서 포장마차에서 참새구이를 먹어 본 적이 있었는데 어릴 적 먹던 참새와 맛이 달랐다. 아마도 참새가 아닌 부화장에서 걸러진 숫병아리였는지도 모르겠다.


여름에 비가 와서 물이 불면 평소 잠방이가 잠길 정도였던 동네 개천들이 가슴께까지 차올랐다. 고기들이 불어난 물에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물 가장자리 수초가 많은 곳으로 모이는데, 개천으로 흘러 들어가는 작은 지류들 중에 폭이 사람이 두 팔을 벌리면 닿을 정도 되는 곳들이 고기 잡기에 안성마춤인 곳이다. 그물 양쪽에 나무를 댄 반도(반두라고도 하고 통발 그물이라고도 함)그물을 한쪽에 대고 다른 쪽에서 물에 들어가 바닥을 쑤시면서 첨벙거리고 내려오면 붕어, 메기, 쏘가리, 민물게, 모래무지, 가물치, 미꾸라지 같은 것들이 그물에 걸렸다. 장소를 옮겨 다니며 대충 두어 시간만 그물질을 해도 양동이 서 너 개는 족히 가득 찼다. 보무도 당당히 고기 잡은 양동이를 들고 집에 오면 게는 쪄 먹고, 붕어와 쏘가리 등은 생선찌개로 저녁 밥상에 올라왔다. 미꾸라지는 소금에 씻어 으깨서 추어탕을 끓였고, 메기나 가물치는 잘 고아서 어른들이 보약으로 잡수셨다. 요즘도 가끔 추어탕을 먹으러 식당을 찾지만 아무리 맛있는 집도 예전에 먹던 그 맛이 나질 않는다.


하루 종일 뛰어다녀도 지치지 않던 꼬마들에게는 꿩조차 어렵지 않은 상대였다. 꿩은 닭보다는 잘 날지만 다른 새들처럼 하늘을 거침없이 나는 새가 아니다. 꿩 잡는 도구는 단 두 가지, 단풍나무를 깎아 만든 실한 막대기와 튼튼한 두 다리만 있으면 되었다. 풀숲을 헤치고 다니다가 꿩이 푸더덕! 하고 튀어 오르면 꿩이 날아간 쪽으로 좇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꿩이 숨어 있을 만한 곳을 막대기로 휘저으면 꿩은 또 한 번 휙 날아올라 다른 수풀 속으로 처박힌다. 그러면 또 그리 뛰어서 좇아간다. 그렇게 한두 시간을 끈질기게 좇으면 날기에 지쳐 머리만 풀 속에 처박고 버들버들 떨고 있는 꿩을 찾을 수 있었다. 무리 중 제일 용감한 녀석 하나가 막대기로 꿩을 후려치는 것으로 꿩 사냥이 끝났다. 운이 좋으면 꿩이 날아간 반대 방향을 뒤져서 암꿩(까투리)과 메추리만 한 새끼들까지 잡을 수 있었다. 꿩은 귀한 고기라 해서 조금씩 나눠다가 만두를 해 먹었고 길고 화려한 장끼(수꿩) 깃털은 언제나 골목대장 차지가 되었다.


그나마 아이들에게 자연을 경험할 수 있게 해 주는 기회가 캠핑이다 (Kings Canyon National Park, Summer, 2012)


내 어린 시절이 지금 아이들의 그것보다 더 행복했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래도 나보고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을 것이다. 내 기준으로 바라본 요즘 아이들은 너무 불쌍하다. 거의 게임과 인터넷에 중독되어 다른 것들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큰 마음먹고 차를 몰아 복잡한 시내를 빠져나가면 한두 시간 만에 멋진 scenery가 창밖으로 펼쳐지지만 여전히 전화기에서 눈길을 떼지 못한다. 아이들에게 아빠의 어린 시절 놀이들에 대해 얘기해 주면 아이들은 신기해하고 부러워하기도 하지만 그것들이 어떤 즐거움이었는지 감히 상상해 내지 못한다.


가끔 아이들을 데리고 캠핑을 하지만 가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들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라이센스를 사지 않으면 낚시도 할 수 없거니와 야생동물을 함부로 잡았다가는 큰 곤욕을 치러야 한다. 요세미티(Yosemite) 국림공원 같은 곳으로 캠핑을 가면 어렵잖게 사슴, 곰 등을 볼 수 있는데 절대 가까이 가지 말고 먹을 것을 주지도 말라는 경고 싸인이 붙어 있다. 내 어렸을 때처럼 자연과 한 몸이 되어 섞이기란 이제 불가능한 세상이 된 것이다.


그래도 나는 일 년이면 두어 번씩 캠핑을 떠난다. 그나마 이제 큰 아이와 둘째가 성인이 되어서 다섯 식구가 시간을 맞추는 일이 그리 쉽지 않다. 이제는 캠핑도 많이 고급스러워졌다. 작년에는 캠핑카를 빌려 LA에서 Utah주 Arches 국립공원까지 다녀왔다. 집채만 한 차를 끌고 장장 2천 마일 (3천 km)을 운전해야 하는 여정이었고, COVID-19으로 항상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했지만, 그래도 바쁜 아이들을 독려해서 짐 싸고 푸는 귀찮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길을 떠나는 이유는 아이들에게 평생 가지고 갈 기억 거리를 만들어 주고 싶기 때문이다. 비록 고생스럽고, 여행 때문에 일정을 재조정해야 하고, 때로는 말 안 듣는다고 길바닥에서 쥐어터지는 일이 있더라도,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 아이들이 나처럼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고 그때의 그림을 떠올리며 행복해하는 소소한 행복을 맛보게 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큰 아이가 어릴 적에 생일 카드에 이런 글을 써 준 적이 있다. 한글로 바꾸면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생일인 오늘이 1년 중에서 가장 기쁜 날이길 바래. 네가 다 큰 후에 어느날 영문도 모르게 네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면 그건 아마도 오늘의 행복한 기억이 네 속에서 되살아나 너를 간지럽혔기 때문일거야."


사람은 추억을 먹고 자란다. 과거에 집착하는 것과는 다르다. 나는 좋은 기억들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며 선하게 만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 좋은 기운을 가진 기억들을 사기 위해 시간을 모으고, 일을 하고, 돈을 번다. 내가 얻는 것을 생각하면 별로 아깝지 않은 거래다.


Zion National Park, Arches National Park, Sedona National Park, Fall,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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