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 관찰 예능이나 짤막한 SNS 영상 등을 보면, 어린 아기를 키우는 부모님들이 아기가 깰라 조심스레 움직이는 귀여운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혹여 조금이라도 부산스러운 행동을 했다 아기가 잠에서 깬다면, 우렁차게 눈물을 터뜨리는 아기를 다시 잠재우기 위해 고단한 노력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기가 잠이 들면 아주 작은 소리를 내는 것도 삼가고, 말과 행동의 볼륨도 줄인다. 서로 소곤소곤 대화를 하고, 아기가 누워있는 방에 들어갈 때면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걷는다.
우리의 마음은 비정기적 알람이다. 절대 소리가 나서는 안 될 것만 같은 고요한 도서관 열람실에서 미처 생각지 못했던 알람이 시끌하게 울렸다고 상상해 보자. 마치 잠자는 아기를 깨운 것 마냥 요란하게 울어대는 휴대전화에 사람들의 시선이 몰릴 것이다. 나는 우리의 마음이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안온했던 마음이 예상치 못한 자극에 의해 깨어난다면, 우리는 요란히 우는 마음을 복구하기 위해 꽤 당황스럽게 노력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다소 무던해서 웬만한 자극에 쉽게 역치를 넘지 않기도 하지만, 나와 같은 예민한 부류의 사람들은 소소한 자극에도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그래서 마음을 깨우지 않기 위해 더 소심해지고, 낯을 가리고, 말과 행동의 반경이 작아진다.
사실 웬만한 사람들의 마음 역치는 높지 않은 편이라, 누구나 갑작스레 찾아오는 자극들에 쉽게 흔들리곤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토록 어리고 예민한 마음을 깨우지 않고 평온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의지할 구석을 찾는다. 식물이 올곧게 자라도록 나무젓가락 같은 지지대를 세우듯 무언가를 자신의 마음 지지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지지대는 사람마다 다르다. 힘들 때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될 수도 있고, 나를 변함없이 사랑해 주는 반려동물이 될 수도 있겠고, 부모님, 커피, 음악, 종교, 낮잠, 산책 등등 각자의 지지대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지지 수단을 활용해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자극을 치열하게 방어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가끔은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폭풍 해일이 찾아오기도 한다. 단순한 지지대로는 결코 견딜 수 없는 거대한 흐름과 자극. 아무리 말과 행동을 조심스럽게 놀린다 해도 우렁찬 천둥이 치면 아기가 깰 수밖에 없는 것처럼,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큰 자극이 들이닥치면 우리 마음은 겨를도 없이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이러한 대략난감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할 방법을 몰라 우왕좌왕하다, 체념하는 심정으로 넘실거리는 파도에 몸을 던져버리는 순간, 그 마음을 다시금 잠재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난 눈물을 잘 참는다. 눈물이 날 것 같은 순간은 정말 많은데 함부로 눈물방울을 뺨에 흘려보내지는 않는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슬프거나 우울해지면 나는 갑자기 말수가 줄어들고 눈가는 촉촉해진다.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다. 눈물을 한 방울이라도 흘리는 순간, 그 작은 방울 하나에 나의 가녀리고 소중한 마음을 맡겨 버리고, 그러면 나는 나의 마음을 스스로 제어할 수 없게 된다. 눈물이 눈에 붙어있는 순간까지는 이런저런 합리화로 마음이라는 신생아를 보살필 수 있지만, 눈물 방울이 마음을 안아 들고 나를 떠나는 순간, 마음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바깥의 지극히 객관적인 존재가 된다.
사실 잘 모르겠다. 아무리 이런저런 지지대를 덧대어도 막을 수 없는 자극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나의 삶을 점검하면 점검할수록 왜 자꾸 막막한 마음이 드는 걸까. 삶의 거시적 목적을 좇기 위해 어떠한 미시적 노력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럽다. 상상하지 않았던 하루가 눈앞에 자꾸만 당도하는 것이 아직 내게 벅차다. 낮에는 그리도 예뻤던 거리가 밤이 되면 그다지 예쁘게 보이지 않기도 하듯이, 과거의 내가 자신 있게 확신한 최선의 결정이 시간과 공간이 바뀌며 의심스러워지는 것이 괴롭다. 그래서 더 행동이 조심스러워진다. 내가 낳고 기르는 마음이라는 아기가 점점 예민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연약한 나의 마음을 깨우지 않기 위해, 눈물을 터뜨리지 않게 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모든 힘을 짜내고 있다.
삶의 과도기에 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매일을 고민한다. 그러나 그 질문에 여전히 가장 부정적인 답변을 내놓고 있다. 나에게 묻고 동시에 나를 묻는다. 예측할 수 없는 자극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을 부지런히 찾고 있지만 바꿀 수 없는 현실 앞에 입을 다문다. 이러한 고민과 탐색의 시간이 너무 길지 않았으면 한다. 눈물을 흘린 후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감정 뒷수습의 시간이 너무 길지 않았으면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보이는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 먼 훗날, 가장 찬란한 지금 이 시기를 돌아보았을 때 진한 후회가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의 마음이 조금만 더 단단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