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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초록 Jul 08. 2023

쪼개지기 전에

잿빛 구름으로 여지만 남기던 하늘이 힘껏 돌변해 살벌한 분위기를 준다. 뿌연 창에 부딪히고, 보도블록을 휩쓰는 물의 움직임은 폭력처럼 으르렁댄다. 지금이 건조해빠진 겨울이었다면 이상기후나 자연재해 같은 무서운 말들을 운운하며 스스로 겁을 먹였겠지만, 여름이라는 계절, 이해가 쉬운 후끈한 무렵은 번쩍이는 번개와 선연한 천둥소리에 당위를 부여하고 있었다. 어떤 말도 안 되는 삶의 풍경은 세상이 그러하므로 그래도 될 것처럼 여겨지기 마련이니까. 큰 비가 내리면 그래도 될 것처럼 찾아드는 이름 모를 사람의 익사 소식은 연례행사처럼 반복되며 애도의 깊이가 얕아지기 마련이니까.


저지대는 침수에 유의하라는 안전 안내 문자를 받으면 누군가는 고층건물의 창문을 꼭 닫고 외면하듯 커튼을 친 뒤, 비가 내리는 날에 어울리는 음악과 음식 따위를 머릿속으로 굴리며 운치나 낭만 같은 달콤한 말로 오늘을 장식하는 동안,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는 비문을 매일같이 되뇌며 하루를 살던 여러 삶의 버팀목은 수위가 점진적으로 상승하는 호수처럼 둔갑한 좁은 방에 들어찬 물을 퍼내며, 살고 싶지만 죽고 싶다는 양가감정을 속깊이 담아둔 채 빗줄기가 잦아들기를 티 내지 않고 염원하는 것이 현실이니까.


비를 맞지 않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다. 하나,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이다. 둘, 건물이나 우산 등 비를 물리적으로 피신하는 방법을 도모하는 것이다. 셋, 빗방울이 어딘가에 닿자마자 젖지 않고 사라지는 것이다. 마지막경우는 불가능하다. 빗방울은 사라지는 법이 없다. 결코 지구를 벗어나지 않고 다양한 형태로 흐르며 가을날의 먹거리 수확과 우리 같은 사람들의 생명 유지를 담당할 것이다. 빗물에 쫄딱 젖어 생쥐꼴이 된 사람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내놓는 방식으로 조롱할 것이다. 날 선 첨탑에 닿는대도 쪼개지지 않고 적어도 당분간은 그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며 내력을 과시할 것이다.


19세기 초, 영국의 과학자 존 돌턴(John Dalton)은 모든 물질은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극한의 미량 입자, 즉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원자설을 제기한다. 그의 가설에 따르면 원자는 단일하며,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고 쪼개지지도 않으며 변하지도 않는다. 원자를 뜻하는 영어 단어 'atom'은 불가분, 즉 나눌 수 없음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atomos'로부터 유래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양성자, 중성자, 전자 등 원자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실험을 통해 속속들이 밝혀지기 시작했고, 원자가 쪼개질 수 있다는 사실에 맞춰 원자론은 변화를 거듭했다. 또한 그 요소들이 보이는 운동을 설명하기 위한 여러 개념을 도입하면서 현대의 원자론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쪼갤 수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해 나눌 수 없다는 것은, 그것의 구성요소를 파악할 수 없거나 그것이 애초에 그 자체로 가장 바탕이 되는 요소임을 시사한다. 사과를 반으로 쪼개어 과육이 드러난 두 조각을 만든다면, 나뉜 조각은 결코 완전한 사과로서 작용할 수 없다. 하나의 완전한 사과를 이루는 요소들이 쪼개어 떨어져 이전과는 다른 각각의 기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원자가 쪼개질 수 있음을 파악한 순간 그것을 이루는 요소들의 현상과 기능을 설명하기 위해 양자역학적 개념이 속속들이 제시되었듯 말이다. 쪼개어 분리하는 순간 원래의 것은 즉시 소모되고 상실된다. 결국 쪼갤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의 의미나 영향력까지도 해체하고 말살시킬 수 있음을 전제한다.


쪼개지는 일이 잦은 세상을 산다. 과거, 환경, 처지, 지위, 재력, 거주지, 나이 등이 천차만별인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에는 공통의 이유라도 있는 것처럼 고층건물에서 몸을 던져 뼈가 쪼개진다. 왜 어떤 사람의 팔다리는 흉기에 쪼개져 캐리어에 담겨야 하고, 왜 어떤 사람의 팔다리는 값싼 노동력으로 소모되다 멈추지 않고 도는 기계에 끼여 쪼개져야 할까. 왜 한 사람의 삶의 의미는 너무도 쉽게 쪼개져 묵살되는지, 왜 한 사람의 이야기는 닿기 전에 쪼개져 자음과 모음으로 처절히 파편화되는지, 왜 목숨은 나누어 사고 팔릴 수 있는지, 인간이 쪼개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알 수 없고, 그것이 당연한 자연의 이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없이 씁쓸해진다.


꺾이지 않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떠들어대나, 마음이 꺾일 일은 도처에 널렸다.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떠들어대나, 사람이라면 응당 가져야 할 꿈의 자격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떠들어대나, 그 말에 도리어 배신을 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떠들어대나, 특정 나이에 도달해야 할 것만 같은 특정 수치가 암암리에 수긍되고 있다. 최대 속도로 달리는 사람들에게 넌 뒤처졌다고 속삭이니 막연한 불안과 막막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무언가를 이루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니 패배감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마음이 꺾어지다 못해 쪼개져 조각이 나는 사람들이 많다.


세상이 더 살기에 좋아질수록 더 살기에 나빠지고, 편리하고 미니멀한 것들이 대세가 될수록 더 복잡하게 불편해지고, 서로를 이해할수록 서로를 배척하고 폄하하고 헐뜯고, 서로를 사랑할 여지가 많아졌으나 불어난 사랑에 되레 상처를 입기 쉬워졌고, 잘난 사람들은 많아졌는데 괜한 자격지심에 스스로 못난 사람이 되고, 터치 몇 번에 일상과 소식을 접하고 공유할 수 있으나 그럴수록 더 고독해지고 외로워졌다. 모순 사이를 뒤엉키며 그렇게 우리는 여러 번 쪼개졌고 가끔 우리를 잃었다.


쪼개지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이 조금씩 쪼개지며 원래의 가설이 부정될수록, 우리는 쪼개짐을 설명해내어 이전 것을 수정해야 했다. 쪼개지고 남은 파편의 기능을, 잔해의 현상을 설명해야 했고, 어느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붙여 맺어놓아야 했다. 높은 곳에서 몸을 던져 쪼개진 이의 잔해를 두고 그 이를 둘러싼 이야기를 찾아 어느 정도 맺어두었고, 흉기에 쪼개져 캐리어에 담긴 이의 잔해를 두고는 가해자의 심리를 분석해 어느 정도 결론을 지었으며, 값싼 노동력으로 소모되다 기계에 쪼개진 이의 잔해를 두고선 열악한 산업 현장의 실태를 파악하면서 어느 정도 마무리를 지었다. 쪼개짐은 항상 그렇게 어물쩍 잊혔고, 그 잔해들은 비웃기라도 하듯 여러 번 더 쪼개졌다.


있는 힘껏 세상을 탓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냉소나 비관의 자세로 삶을 짓고 싶은 것도 아니다. 누구의 잘못이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래 그런 것이다. 그래서 씁쓸함을 느낄 뿐이다. 세상 모든 것은 쉽게 쪼개질 수 있다. 그 위태함은 죽이기도 하지만 가끔은 살리기도 한다. 꿈과 노력의 아슬아슬함 덕에 되레 살아야겠다는 집념에 벅차오르기도 한다.


쪼개짐이 잦은 세상에서 단지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구하는 일이다. 지금도 외면되는 사람들의 호소가 쪼개지기 전에 들어주는 일. 닿지 못한 이야기의 파편을 사후처리하는 일이 없도록, 한 사람의 삶이 단념하기 전에 끈끈히 붙여두는 일. 죄 없는 이의 마음과 팔다리가 쪼개지기 전에 아무렴 안아주며 잇고 사는 일. 사랑이라는 쪼갤 수 없는, 쪼개지 못할, 구성요소를 가늠할 수 없는, 감히 가늠해서도 안될 가치로 숨과 숨을 잇고 사는 일. 세상의 바탕이 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기능하는, 결코 쪼갤 수 없는 연민과 공감으로 쪼개지는 사람들을 쪼개지기 전에 구원하는 일. 쪼개지기 전에 붙잡고 살려두는 일. 쪼개지지 않는 빗방울에 점점 가라앉는 사람들을 근거리에서 건져내는 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지 가깝게 다정하고 끈질기게 염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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