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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채 Apr 07. 2024

난데없이 냉커피를...

경기도에 있는 원땡산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 마시고 싶다." , "나도, 나도~". 여기저기서 갑자기 냉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들으니 나도 역시 시원한 냉커피 한 모금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상상이 되면서 온몸의 말초신경들이 꿈틀 되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한여름 땡볕은 아니지만 사월의 태양치고는 꽤나 강열한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
마시고 싶다."


더군다나 일행은 산아래 사찰 주차장에서부터 거의 20kg 정도 되는 배낭을 둘러메고 3시간가량 땀을 뻘뻘 흘리고 이제 막 정상에 도착한 상태였다. 평소 여름철 백패킹은 물을 얼려서 가져오기 때문에 충분히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은 필수코스이자만 오늘 같은 4월 등산에서는 그저 간절한 소망이자 허황된 꿈일 뿐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가져온 디펙(배낭 소품 정리용 주머니)에 챙겨 온 내용물들을 떠올려 본다.


갑자기 머릿속에 섬광이 번쩍하더니 '생수통에 얼려온 얼음'이 생각이 났다. 뭔가 시원하게 마시려고 가져온 것이 아니라, 단지 디펙에 챙겨 온 야채들이 상하지 않도록 냉기를 유지하기 위해 아이스팩 대신에 얼린 생수통을 넣어 온 것이다. "앗싸!!!"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누님들에게 소리쳤다. "누님들, 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 먹게 해 드리면 뭐 해줄 건데요?"




산을 즐기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지만 가끔은 백패킹 산행을 통해 심장이 터질 거 같은 상황을 느끼고 싶을 때가 있다. 병들어 심장이 아픈 거 말고, 운동을 통해서 내 몸의 한계를 최고치에 도달시키고 극복하면서 얻는 짜릿한 만족감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나 능선까지 오르기 전에 만나는 깔닥고개에서는 오랜만에 어깨와 허리근육에 팽팽한 긴장감이 돈다. 호흡은 가빠지고 심장의 박동은 빨라진다. 장딴지와 허벅지 근육은 벌써부터 단단해져 있다.


평소에 느껴보지 못하는 신체의 극한 변화이기는 하지만 정신은 맑아지면서 기분이 좋아진다. 나를 둘러싼 나무와 숲이 나를 그렇게 만든다. 능선 가까워질 무렵, 뒤돌아보니 시야가 탁 트인 전망에 온갖 시름은 저 아래 버려두고 온 나를 발견한다.  '육체의 고통'과  '정신의 행복'은 산을 오르는 동안 공존하지만 결국 산 정상에 도착하면 '정신의 행복'만이 남는다. 거기에 난데없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은 더 없는 행복감을 남긴다.


결국 산 정상에 도착하면
'정신의 행복'만이 남는다.


조금 쉬었다가 쉘터를 세우고 각자 텐트를 셋팅힌다. 아직 날이 어두워지지는 않았지만 쉘터에 모여 각자 준비한 산해진미를 펼쳐놓는다. 첫 번째 요리는 '잡채'다. 집에서 만들어온 잡채가 아니다. 내 눈앞에서 재료를 섞고 버무린다. '산 꼭대기에서 손수 버무리는 참기름 잘잘 흐르는 고소한 잡채라니!' 이건 공중파 TV 프로그램인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만한 사건이다. 그렇게 먹으니 맛도 기가 막히다.   

    



요즘 추위를 많이 느낀 탓인지 사월임에도 산속의 찬 밤공기를 대비하기 위해 겨울용 침낭을 배낭에 서둘러 넣는다고 넣었다. 하지만 산에 오르면서 마주한 봄 햇살에 '겨울용 침낭이 약간 부담스럽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텐트를 치고 침낭을 펼치는 순간 뭔가 잘못된 것을 알았다. 어쩐지 침낭 사이즈가 작은 느낌이 있었는데 '아뿔싸!' 여름용 침낭이었다.


오후 날씨 정도라면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문제는 밤에 발생했다. 쉘터에서의 저녁만찬과 '야경과 밤하늘 별 보기', '텐풍 사진 찍기' 등의 놀이를 마치고 잠을 자러 텐트 지퍼를 열고 몸을 매트에 던지는 순간 느낌이 싸늘했다.  바닥의 찬 기운이 등짝에 지나 온몸에 퍼지면서 냉기를 감지했다. 에어매트에는 바람이 빠져있었고 침낭의 두께는 냉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겨울침낭이거나 에어메트에 공기가 빵빵하게 있기만 했어도 이렇게 차갑지는 않았을 듯했다. 그렇다고 야심한 밤에 자동에어펌프를 가동하기에는 민폐가 될 거 같은 생각이 들었고 혹시라도 펑크가 나있더라면 에어는 다시 셀 수도 있다는 생각에 에어를 넣지는 않았다. 부랴부랴 배낭 속에서 핫팩 2개를 뜯어, 하나는 발밑에, 또 하나는 손에 꼭 쥐고 침낭을 머리 위까지 덮고 잠을 청했다. 다행히 새벽까지 한 번도 깨지 않고 푹 자고 일어나 보니 반짝이는 염소자리(Capricorn)가 나를 반갑게 맞이한다.


" BPL(Backpacking Light, 배낭은 가볍게 ) &
 LNT(Leave No trace,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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