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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대 Jul 01. 2021

전희자 7세, 박아기 1세

1949년 이후 문경, 노근리, 거창 양민학살사건의 기념 풍경

6·25 전쟁 즈음, 양민학살사건이 발생한다.

1949년 경북 문경, 1950년 충북 황간면 노근리, 1951년 경남 거창에서. 오판은 학살로 이어지고 결과는 참혹했다.


양민학살사건의 기념은 어떠해야 할까?

그런데 기념에는 긍정적 의미가 강하니 추념이나 추도에 어색할 수도 있다. 그래도 폭넓게 보아 기념은 추념을 포함한다는 해석을 따르기로 한다.


어떠한 기념 풍경이 형성되어있는지, 세 곳을 찾아본다.



1. 문경 양민학살 어린이 위령비


문경 양민학살 사건은 1949년 12월 24일 공비를 토벌하던 국군 제2사단 25 연대 2대대 7중대 2, 3소대에 의해 경북 문경군 산북면 석봉리 석달마을의 주민 86명이 희생된 사건이다. 그중 여성이 44명, 어린이가 9명이나 된다.


어린이 위령비는 이곳 사건 현장 인근으로, 용선사 옆 작은 언덕에 겨우 자리하고 있다. 비좁은 돌계단을 조심스레 올라가야 한다. 위령제는 추위 탓에 두 달 앞당겨 열린단다. 위령제가 끝난 10월의 작은 마당 모습은 스산하다.


위령비는 사람 키 높이 정도이다.  비문의 "어린이" 글자가 눈에 띈다. 그런데 이면에 15세 미만 어린이 피학 살자가 27명이란다. 공식 집계와 차이 난다. 어린이 정의가 다른 탓인지?

문경 양민학살 어린이 위령비

그리고 바로 위쪽에 작은 헌시비가 하나 있을 뿐이다.

거칠게 깔아놓은 좌대와 상석이 서글픔을 더한다. 사각형 돌판은 뚜렷한데, 새겨진 시 구절은 드문드문 바래졌다.

비는 무심한듯 앙증맞은 어린이 모습 같다.

문경 양민학살 어린이 헌시비

헌시 비:

이름 없는 아기 혼들; 석말동 양민학살 때 죽은 아기들을 생각하며, 시 류춘도


"산 넘어 넓은 세상 머물 곳 찾아

구천 떠도는 어매 아배 기다리며

석 달 마을 산모퉁이에

이름 없는 아기 혼들 울고 있다     

아가들아 아가들아

이름 없는 아가들아

피 묻은 아배 조바위 쓰고

눈물 젖은 어매 고무신 신고

그 옛날이야기 말해주렴

지나가는 길손이 발 멈추거든     

아가들아 아가들아 오늘 밤은

어매 품에 안겨 아배 등에 업혀

백토로 사라지기 전 그 옛날처럼

좋은 세상 꿈꾸며 잠들어라"


읽다 보면 상황 속에 빠져드는 듯하다. 헌시의 기념 효과를 새삼 깨닫게 만든다.


그런데 어린이 피학살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모두 26명이다. 왜 또 숫자 차이가 나는지?


안타깝고 아쉬운 기념 풍경이다. 사건 자체가 그러한 데, 이곳 모습은 여전히 도외시된 듯하다.

어린이를 위한 그 수많은 찬가와 화려한 기념과 꾸민 수식은 다 어디에 있는가? 여기 억울한 어린이 위령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2. 거창사건 추모공원


거창 양민학살사건은 1951년 2월 9일~12일 빨치산 토벌을 구실로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서 국군 제11사단 9 연대 3대대에 의해 민간인 517명을 박산에서 총살당한 사건이다.

1996년 김영삼 정부 때 관련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박산골 희생 장소 보존비

사건 발생 56년이 되어서야 보존비가 건립되었다. 희생장소 부근이다. 전통 형태의 비석 옆에는 쪼갠 돌판에 헌시비를 새겼다. 전통 형태가 오히려 어색한 “현대판” 조형물보다 낫다.

이 비는 장소를 알리는 역할이나, 상상 속에 존재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현장은 실재하니, 기념물은 실마리 하나일 뿐이다.

거창 박산골 희생 장소 보존비와 헌시비와 총탄 흔적 바위

헌시: 박산아 말해 다오 차석규

… 구천에서 맴돌고 있는 넋들이

오늘도 울고 있다오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이런 일을

후세 길손들은 기억할 손가!

박산아 말해 다오

감악산아 대답해다오

여기 비명에 간 신원 양민이

지금도 외치고 있다오.     


총탄 흔적이 남은 작은 바위가 정원석 같이 경사진 단을 메꾸고 있다.


거창사건 추모공원과 위령탑

박산골에서 남동쪽 1km 떨어진 이곳 사천천을 끼고 대규모 추모공원이 조성되었다.

추모공원은 일주문을 시작으로. 위패 봉안각, 위령탑, 거창사건 희생자 묘역, 역사교육관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대부분 전통양식을 갖추려 했다.


위패 봉안각은 승화 공간으로 신원면 3곳에서 희생당한 719명(14세 이하 359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거창사건 추모공원, 위령탑

높이 18m의 위령탑은 완만한 곡선으로 구성되어 비약하는 형태이다.

조형 의도는, 거창사건으로 희생된 남자, 여자, 어린이의 무덤을 상징하는 3단의 돔 사이로 영혼이 부활하여 어둠을 뚫고 하늘로 오름을 상징한다고 한다. 주변 바닥의 청색이 뚜렷하다.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듯하다.

거창사건 추모공원 위령탑의  환조 군상, "참회"

거창사건 위령탑 건립에 부쳐

"…

주민들은 천지간 하소연할 데도 없이

타다만 시신을 거두어

큰 뼈는 남자, 중간 뼈는 여자, 작은 뼈는 아이로

구분하여 박산 합동묘소를 만들었다.

잘못된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두 번 죽었던 희생자들

천지신명이시여 이들을 받으소서.

…"

2003년 6월 시인 표성흠 짓다     


좌우에 석상은 참회와 상황을 알리려는 의도. 특히 "참회"는 사죄하는 듯 무릎을 꿇고 군인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렇듯 형상으로 표현하면 용서가 쉬운지?


배경 벽의 부조는 평화로운 마을 분위기와 무기를 들고 항거하는 군중들과 양민들 모습이 뒤섞여있다.  


그리고 입구 길가에 거창 양민학살사건 판결문 비, 거창사건 신문 보도자료, 신중목 국회의원 공적비, 공적비 등이 제각각이나 그래도 나란히 섰다. 이색적이다.

거창사건 추모공원의 꽃밭, 거창양민학살사건 판결문 비와 신중목 국회의원 공적비

공원 넓은 곳에 꽃밭이 화사하다. 사람들이 즐기고, 여러 행사도 열린다.

이제 추모공원이 거창 지역민을 위한 중요한 이벤트 장소로 발전한 것이다. 비극을 극복하고 승화한 모습으로 이해하고 싶다.



3. 노근리 평화공원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은 1950년 7월 25일부터 5일 동안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부선 철로에서 미군이 피난민 속에 북한군이 있다고 판단하여 폭격, 사격하여 민간인이 250~300명이 희생된 사건이다.


반세기가 지난 2001년 1월 미국 클린튼 대통령이 유감 표명 성명서 발표하였고, 2004년 특별법에 근거, 사건 현장 일대에 노근리 평화공원이 조성되었다.


사건 현장인 쌍굴다리 지금도 이용되고 있다. 총탄 자국이 무수하게 나 있는 벽체를 유지하고 있다.

영동 노근리 쌍굴다리

노근리 평화공원은 사건 현장인 쌍굴, 위령탑, 참배광장, 조각공원, 평화기념관, 방문자센터, 진입광장, 만남의 광장, 추억의 생활전시관, 평화광장, 교육관, 희생자 합동묘역, 생태연못과 습지, 야외전시장, 전망대 등 수많은 시설과 공간으로 구성되었다. 의외로 넓고 다양하다.


제막사에서 이곳이 "세계 인권의 메카, 평화 확산의 전당으로 승화∙발전하기를 충심으로 염원" 하고 있다.


한가운데 위치한 평화기념관에는 지하층(프롤로그, 아픔이 서린 기억의 조각, 희생자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과 1층(프롤로그, 기억의 고리가 세상에 알려지다, 평화 네트워크, 디지털 아카이브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깥의 별도 출입구를 통해 입장하여 긴 경사로를 따라 지하층부터 관람하도록 동선 설계가 되어있다.

건물 입면에 여러 조각의 코르테인 강판이 더해져서 또 다른 표면을 이루었다.

노근리 평화기념관과 그 입구

심사평:  "… 경사로, 지하층의 홀, 전시공간, 쌍굴다리를 은유화한 터널과 고통의 벽을 통해 관람객에게 묻힌 역사를 환기시키고 있다."


위령탑을 “평화·화합·추모의 비”로 명명하였는데, 여러 요소로 이루어졌다. 금속구, 다섯 개의 메탈 폴, 벽체, 피난행렬 동상 군, 벽화 등이 원, 직선, 사선의 요소로 엮어졌다.

노근리 평화공원, 노근리사건 희생자 위령탑

구성주의 경향을 보인다.

전면에 쌍굴다리를 떠나는 피난 행렬은 벽화로부터 이어진다. 평면에서 입체로. 기록에서 현실로 들어오는 듯 보인다. 기억을 재생시키는 듯하다.

다만 높이 솟은 다섯 금속 기둥과 큰 금속 구는 무슨 의미인지? 기념 풍경을 이루는 구성적 조형에서 상징 효과는 우수한 만큼, 정확한 메시지 전달도 필요하다.


공원 내 여러 기념물이 배치되어 있다.


헌시: 말하라! 그날의 진실을- 노근리 양민학살사건

평화를 뜻하던 비둘기가

어느 날 갑자기 쌍굴다리에서

빨간 고무장갑을 벗고

독수리로 변하였네!… 

시: 정삼일


기념수 헌정:

“노근리사건 희생자와 유족분들을 기억하고 분단된 한반도의 치유와 화해를 소망하면서 이 나무를 심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2)"

2017.11.2. 미국 장로교 한반도 평화 순례단

노근리 평화공원 내 조각공원 조형물과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의 유엔 분수광장 조형물

그런데 조각공원의 작품 하나는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비슷하다. 10년 이상 시차가 나는데. 흔한 기법으로 카피의 의미조차 없을 정도인가. 아니면?



맺음말


노근리 평화공원은 구체적인 기념 풍경으로서 여러 가지를 충분히 갖추었다. 사건 현장이 남아있고, 특별법은 물론 미 대통령의 유감 표명까지 받아냈으니, 이제 추념에 더하여 화해와 승화의 기회를 가질 만하다. "평화"를 내세운 것도 같은 맥락이리라.


건축과 위령탑의 창작에 피격당한 처절한 현장의 어두움이 효과적인 조형언어로 표출되었다고 본다. 다만 이곳이 너무 넓은 탓인지, 조각공원 등 일부는 그 품격에 아쉬움이 남는다. 심지어 채우기에 급급했다는 인상마저 준다.


이제 노근리 평화공원은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 충분한지?

기념 풍경은 대부분 장치일 뿐이다. 기념은 결국 우리의 마음에 달린 것 아닐지.

기념의 의의를 되묻게 한다.



관련 기념지(건립 순)

1. 문경 양민학살 어린이 위령비, 문경 양민학살 어린이 헌시비: 2002년 12월 24일 건립,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석봉리 235 옆, 헌시(이름 없는 아기 혼들): 류춘도, 제작: □□□

2. 거창사건 추모공원, 위령탑: 2004년 4월 2일 준공,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신차로 2924, 추모공원 조경: □□□, 건축: □□□, 헌시(거창사건 위령탑에 부쳐): 표성흠, 헌시(꽃등 환하게 켜진 한 길로 오소서): 염민기, 제작: □□□

3. 박산골 희생 장소 보존비: 2004년 4월 건립,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과정리 산 66-6 박산골 학살터, 글: □□□, 글씨: □□□, 헌시(박산아 말해다오): 차석규, 제작: □□□

4. 노근리 평화공원, 평화기념관, 노근리사건 희생자 위령탑: 2011년 10월 27일 조성,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목화실길 7, 평화공원 조경: □□□, 평화기념관 건축설계: ㈜건축사사무소 엠아이씨 이상진, 이종호, 우의정, 위령탑 글: 정구도, 조각: 이창수, 청해조형연구소, 조각공원 조각물 제작: 박건재, 박찬걸, 임종찬 등, 추모 시: 정삼일, 도예: 맹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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