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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라이닝 May 07. 2024

훌라는 자유

새섬에서 춘 첫 훌라

사이판에 가면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바로 멋진 풍경의 일부가 되어 훌라를 추는 것이었다. 자연이 주인공이 되고 내가 배경으로 스며드는 춤을 추고 싶었다. 그리고 여행 첫날 사이판 북쪽 끝 바다에서 훌라추기 딱 좋은 멋진 풍경이 나타났다.


"와, 여기 너무 예쁘다. 언니, 여기서 훌라 추면 잘 어울릴 것 같아요!"


함께 동행한 동생이 내게 훌라를 추어 보라고 권유했다. 사실 나도 마침 어깨가 들썩이던 중이었는데 이렇게 떠밀어주니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럴까?"


파우를 입고 있지는 않았지만 하와이의 바이브가 담겨 있는 초록색 점프슈트를 입고 있었다. 최근 배운 "Pearly Shells"를 머릿속에 얼른 한번 돌려보았다. 여행에 오기 직전에 배운 2절은 가물가물했다. 일단 지금 기분과 훌라 본능에 몸을 맡겨보자고 생각하고 신발을 벗었다. 동생이 핸드폰 카메라를 이쪽저쪽으로 움직이며 알맞은 위치를 잡아주었다.


Pearly Shells From the Ocean

Shining in the Sun

Coveing the Shore

When I See them

My Heart Tells that I Love You

More Than All Those Little Pearly Shells


습관적으로 틀리던 부분에서 또 틀리는 게 느껴졌지만 춤이란 건 시적 허용처럼 여행적 허용이 있지 않을까 합리화하며 무조건 즐겼다.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는 게 느껴졌다. 촬영해 주는 동생도 내내 함께 웃었다. 음악을 틀 여건이 되지 않아 무반주로 오직 마음의 사운드에 의지해서 추었다. 신기하게도 어디선가 노래가 크게 울려 퍼지는 듯했다. 분명 음악이 온 바다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다 추고 나니 주변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뒤늦게 느껴져 얼른 신발을 신었다. 뜨거운 햇빛 덕분에 쑥스러워 빨개진 얼굴을 숨기고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 아들과 사진을 찍었다. 그래도 이나마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다니 나도 정말 많이 변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사람들 앞에 서면 손이 덜덜 떨리고 몸이 굳어서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출 일이 있었을 때 무대를 망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만이 바이브로 표현하고 싶은 욕구에 비해 콩알만 한 심장은 작아도 너무 작았다. 그런 내가 이렇게 해맑게 웃으며 자유롭게 춤을 추었다. 그것 만으로도 나는 자유로움을 느꼈다.


예전에 티브이에서 유럽의 한 노부부가 길에서 자유롭게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편하게 추는 듯했지만 사실 기본기가 탄탄하다는 게 느껴졌다. 나도, 나중에 저렇게 춤을 잘 추면서도 여유롭고 자유롭게 표현하고 싶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러려면, 40대쯤부터는 춤을 하나 제대로 배워서 내 몸에 술처럼 푹 익혀야지 다짐했다. 그리고 운명적으로 나에게 찾아와 준 훌라를 취미에서 나아가 전문 지도자 과정으로 함께 하고 있다. 지도자가 되겠다는 목표보다는 훌라를 내 몸에 찰떡같이 하나가 되게 만든 다음 꼭 할머니가 되었을 때 여유로움을 장착해 어느 날 이름 모를 골목에서 추겠다는 야무진 꿈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다.


물론 지도자 과정을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마냥 맘 편히 즐길 수만은 없는 게 사실이다. 훌라는 하와이의 언어이기도 해서 훌라댄서를 '이야기를 전하는 스토리텔러'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니 번역가가 되어 오역 없이 원어를 잘 전달하는 것도 훌라댄서의 역할일지 모른다. 과하지 않고 담백하게 기본에 충실하고 나서 나의 훌라를 출 수 있게 되길 바라 본다. 그리고 이를 위해 매일 훌라 앞에서 겸손해지자고 자신에게 늘 당부한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실게요."


가이드의 목소리에 한 번 더 '새섬'을 눈에 담으려 몸을 돌렸다. 그곳에 방금 전에 훌라를 추고 있던 내 모습이 함께 있었다. 느린 곡의 훌라가 나를 달래고 얼러주며 아픈 곳을 치유해준다고 한다면, Pearly Shells처럼 경쾌한 곡은 에너지를 끌어올려주는 힘이 있었다. 여행에 오기 전에 가졌던 불안과 걱정이 도넛에 발라진 설탕처럼 입안에서 스르륵 녹아내렸다. 이제 진짜 도넛을 맛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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