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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라이닝 May 06. 2024

죽음 앞에서 내가 외칠 말

만세절벽 앞에서

사이판의 만세절벽 앞에서 깊은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대 일본제국 만세!'하는 일본군의 외침과 '풍덩' 하는 죽음의 소리가 함께 들리는 듯 했다.


2차 세계 대전, 일본군이 사이판을 방어하던 중 미국군의 승리로 인해 많은 일본군이 항복했다. 사이판에 있었던 수많은 일본군들은 마지막으로 만세를 외치며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외국 관광객들에게는 나라를 향한 일본군의 신념과 충정을 보여주는 곳이고, 한국인들에게는 역설적으로 광복의 기쁨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나라와 이상을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건 개인에게는 어떤 의미일까?'하는 죽음에 대한 의문이 드는 곳이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눈앞의 바다만큼 깊고 두려운 선택이었으리라.


나에게 죽음은 불변의 진리이자 피할 수 없는 과제로,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나에게 많은 걸 가르쳐준 인생의 스승이기도 했다. 대학생 때 아빠가 돌아가시고, 결혼 후 교통사고로 갑자기 여동생이 죽었다. 가족의 죽음 앞에서 스스로에게 '왜?' 라는 의문을 끝도 없이 던졌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하며 꽤 긴 시간을 보냈다. 최근 엄마를 떠나보내고 나서는 더 철학적으로 변하고 사색을 자주 했다. 돌아보니 가족을 한 명씩 떠나보낼 때마다 인생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계기가 된 셈이었다.


무엇보다 죽음의 불확실성에 대한 뼈저린 경험은 삶의 소중함을 알게 하고 일상에 감사하는 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죽음을 피할 수 없으니 대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선택하는 것이 내 몫이자 최고의 권리라는 것 또한 깨닫게 했다. 덕분에 과거나 미래보다 현재에 집중하고 지금 가진 행복을 감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최근엔 타인의 기대나 감시에서 벗어나 나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자유롭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용기도 생겼다.


엄마의 죽음 앞에서 '행복한 죽음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엄마에게 마지막으로 '행복한 죽음'을 선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3주 동안 엄마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 시간 동안 엄마 인생의 가치를 찾을 수 있는 대화를 하려고 노력했다. 엄마가 인생을 되돌아보며 기쁨과 행복을 찾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엄마의 삶이 매우 의미 있었으며 보람된 시간이었음을 확인시켜 드리고 싶었다.


죽음이 무서웠지만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처음엔 서로 미안하다는 말을 많이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고맙다, 덕분에 즐거웠다, 행복했다'는 말을 훨씬 더 많이 주고받았다. 소소한 추억부터 가슴 아팠던 사건들까지 생각날 때마다 이야기하며 웃다 울기를 반복했다. 동생이 교통사고로 갑자기 죽었을 때 가장 힘들었던 게 이런 시간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었다.


고맙다, 미안하다, 덕분에 행복하다는 말한마디 하지 못한 게 그렇게 한이 되어 10년 넘게 가슴을 후벼 팠다. 이 세상 전재산과 내 장기를 걸어서라도 1분만 잠깐 동생을 만날 수 있다면 그 말을 하며 꼭 안아주고 다시 보내주고 싶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굿을 하면서라도 혼에게 목소리를 전하려고 애쓰는 거였구나' 이해도 되었다. 불행 중 다행히도 엄마와는 이런 대화를 할 수 있음에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수많은 죽음이 깊은 바다로 빨려 들어간 절벽 끝에서 아이러니하게 내 삶의 소중함을 상기하고 감사한 마음을 되새겼다. 여전히 마음 한 편에 조금이라도 더 다정할 걸,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걸 하는 후회가 들 때도 있지만 이제는 후회보다 엄마와의 추억을 기리며, 엄마가 남겨준 '나'라는 존재에 감사하고 '내 삶'을 아끼며 살고 싶다. 나라를 위한 희생이 아니라 나를 위한 행복한 삶을 마치고 죽음 앞에서 외치고 싶다.


내 인생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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