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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라이닝 May 08. 2024

수영장 같은 인생 vs 바다 같은 인생

수영장 앞바다

사이판에 또 언제 올까 싶은 다소 가난한 마음으로 매일 아침 눈만 뜨면 선크림을 척척 주르륵 바르고 수영장으로 나갔다. 첫날 거울을 보며 시시각각 나를 걱정시켰던 기미가 이젠 턱밑까지 내려왔으나 리조트 수영장 맛을 안 이후로 더 이상 안중에도 없었다. 피부 걱정은 미래의 나에게 맡기고 아이들보다 더 전투적으로 물놀이를 했다.


물놀이를 좋아해서 어렸을 때 자연스럽게 물에 뜰 수 있었다. 동네 수영장에서 진행한 방학특강 덕에 기본 자유형과 배영, 평영의 영법까지 가능했다. 키가 작아서 아주 깊은 물은 여전히 두려웠지만 수영장에서 만큼은 자유롭게 물놀이를 할 수 있는 편에 속했다. 그러니 적당히 내리쬐는 태양과 뜨끈한 공기의 온도, 건조한 바람이 부는 사이판에서 수영을 생략하는 건 최악의 사치이자 평생 후회할 게으름이었다.


리조트엔 진정한 인피니티풀인 바다가 바로 앞에 펼쳐져 있었다. 유아를 위한 미니풀장 옆에 어린이 파도풀, 성인 키 높이의 깊은 풀장 옆으로 작은 나무 문을 밀면 드넓은 남태평양의 바다가 시작되었다. 부표가 있는 곳까지 꽤 거리가 멀어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스노클링과 카약, 패들보드를 즐기고 있었다. 어른 무릎 높이의 해변엔 작은 물미끄럼틀이 하나 있었다. 어린아이들이 그곳에서 자기들 나이에 즐길 수 있는 최고봉의 슬라이드에 도전하는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 우리 팀 막내 5살짜리 막내 꼬맹이는 야심 차게 슬라이드 꼭대기에 걸어 올라갔지만 두려움에 결국 다시 계단으로 되돌아 내려와야 했다. 수영장이 아니라 바닷물이 종착지라는 게 조금 무서웠던 듯했다.


문득 수영장과 바다에 내 인생이 대입되었다. 수영장은 안정적이고 평온한 곳이었다. 일상이자 휴식의 공간이기도 했다. 곳곳에 가이드가 있어 나를 지켜주었고 위험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했다. 반면에 바다는 자유와 모험을 상징했다. 매일 비슷해 보이지만 하루도 같은 적이 없는 바다는 불확실성을 품고 있었다. 미지의 심연은 나에게 두려움과 동시에 용기를 가지게 하는 존재였다. 인생은 어느 땐 수영장 같다가도 어느 순간 험한 바다가 되기도 했다. 미니 풀장 같은 곳에 놀던 시절이 재미있었을 때도 있었지만 지루해 질 즈음 일부러 바다의 파도를 맞으러 나서기도 했다. 최근엔 바다의 풍랑을 세차게 맞아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 중이었다.


나는 상대적으로 바다를 조금 더 좋아하는 편에 속했다. 아이들과 다른 여행 식구들은 주로 수영장에서 노는 걸 선호해서 혼자 바다에 나가서 노는 시간이 많았다. 수영장은 물놀이에만 특화되어 있을 뿐 다른 감각을 깨우기에는 바다가 적격이었다. 모래를 밟을 때마다 몸이 미세하게 가라앉았다가 올라오는 기분이 마치 팽팽한 트램펄린에서 중심을 잡고 걸어가는 듯 했다. 수영장의 투명한 냄새와 다른, 짙고 깊은 바닷바람 냄새는 내가 지구본의 어느 지점에 있는지 상상하게 해 주었다. 혼자 패들 보드를 타고 멀리 나갔다가 거세진 바람에 움찔해서 정신없이 노를 저어 돌아오는 일도 재미있었다.


따지고 보면 나의 탐험 본능도 바로 곁에 안정적인 수영장이 있다는 안심 때문이었을 것을 안다. 바다 역시 부표를 절대 넘지 않는 선에서만 즐겼다. 나는 안정적인 탐험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인간의 기본 욕구 중 자유의 욕구가 강하긴 하지만 여전히 안정과 애정의 욕구 또한 강한 사람. 그러니 수영장 옆 바다가 얼마나 좋았을까! 자유롭게 놀다가 쉬고 싶으면 수영장으로 들어갔다. 지루해지면 다시 나와 나만의 탐험을 즐기고 나의 욕구를 채운 충만함으로 저녁 식사를 했다.


리조트 안 식당에 앉아 있으면 수영장과 바다가 한눈에 함께 들어왔다. 식사를 할 때마다 두 공간을 눈에 담으며 내 삶의 수영장과 바다를 떠올렸다. 앞으로 사는 동안 시절마다 어느 곳에 있고 싶어 하는지 스스로 마음을 점검해주기로 했다.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도전해 온 시간 동안 놓쳤던 안정을 위한 선택들도 이제는 소중하게 챙기겠다고 석양에 전했다. 책임감과 역할에 대한 고민보다 본능과 일상에서의 욕구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게 된 하루가 지나고, 나는 또 그만큼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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