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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라이닝 May 09. 2024

패들보드 타고 괌까지 할 뻔했지 뭐야

용감했던 나를 기억해

비취색 마리아나 해구 근처의 태평양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패들보드를 탔다. 


한참 리조트 수영장에서 정신없이 수영을 하고 아이들과 놀아주다가 문득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수영장 물과는 또 다른 바다에서 잠시 스노클링과 수영을 즐겼다. 바닷물은 살랑이는 파도와 헤엄치는 물고기들 덕분에 제아무리 잔잔해 보여도 끊임없이 움직임이 느껴졌다. 목욕탕의 탕 안에서 가만히 있을 땐 모르다가 누군가 한 명이 들어와서 물이 찰랑, 움직이면 내 몸의 작은 털들과 피부가 물결을 느끼는 것과 비슷했다. 수영장의 물은 사람들이 첨벙거릴 때야 비로소 움직임이 생겼지만 바다는 늘 크고 작은 파동이 있는 살아있는 물이었다. 


"언니, 여기 패들보드도 탈 수 있대요. 언니 운동 잘하니까 한 번 해 봐요."


나의 호기심을 잘 아는 동서가 나에게 새로운 스포츠에 도전해 볼 것을 권했다. 


"오호, 그래?"


언제나처럼, 귀가 솔깃했다. 번지점프나 스키처럼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거나 빠른 속도로 내려가는 활동을 제외하고 웬만한 운동을 좋아했다. 호기심에 패들보드가 뭔지도 모르고 일단 해보겠다고 했다. 만족스러운 여행일수록 내 일생의 마지막 여행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그러니 여행 하루 만에 이미 만족하기 시작한 여행에서 남은 시간동안 해 볼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리조트 한쪽 구석, 구명조끼 대여소에서 패들 보드와 카약, 윈드서핑을 함께 대여해주고 있었다. 1인당 30분 사용을 전제로 오는 순서대로 대여해 준다고 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가서 대여할 수 있냐고 물으니 안타깝게도 업무시간이 끝났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무척 실망한 나머지 어깨가 축 처지고 말았다. 다음 날 타면 되는 일인데도 아이처럼 지금 당장 하지 못한 것에 순간 속이 상했다. 돌아서는 내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보였는지 직원분이 잠깐 와보란다. 마지막 한 대를 빌려간 사람이 아직 안 돌아왔으니 가서 그 사람이 돌아오는 대로 얼른 타보고 갖다 달라고 했다. 아이처럼 기뻐하며 해변으로 달려갔다. 때마침 한 사람이 패들보드에서 내려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얼른 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패들보드와 노를 건네받았다. 


바닷가를 지키고 있는 리조트 가이드 분이 다가와서 패들보드 타는 방법을 아느냐고 물었다. 처음이라고 말하자 곧바로 패들보드 위에 앉아 중심을 잡으라고 하며 한 손에 노를 쥐어 주었다. 생각보다 중심 잡기는 어렵지 않았다. 가이드는 노를 한 번씩 번갈아 젓는 법과 노의 방향을 바꿔 잡는 노하우를 알려주었다. 서 너 마디로 모든 설명을 끝내고 가이드는 이제 혼자 타보라고 웃으며 나를 태평양으로 떠밀었다.


무릎높이의 물이니까, 크게 걱정은 되지 않았다. 방금 들은 가이드의 설명을 입 밖으로 다시 한번 소리 내 보았다. 그리고 일어서서 조금씩 노를 젓기 시작했다. 


"왼쪽 한 번, 손 바꿔서 한 번, 반대 손을 위로, 방향을 바꿀 땐 이렇... 게"


어떤 운동이든 처음 시작할 때는 온몸이 유기적으로 움직이게 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패들보드에 첫 도전한 내 몸은 역시나 로봇처럼 삐그덕거리다가 풍덩, 물에 빠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얼마 후 신기하게 노를 젓는데 리듬을 타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제야 발바닥만 향해 있던 고개가 들리고 멀리 바라볼 수 있었다. 처음엔 해변과 리조트 쪽으로만 향했던 시선이 조금씩  태평양 바다로 이동했다. 땅에서 바라보는 바다가 철창 안의 사자를 보는 기분이었다면 바다에 들어와 360도로 둘러보는 바다는 사파리였다. 생전 처음 보는 나무와 꽃과 풀, 그 사이로 뛰어다니는 야생동물들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마음으로 마리아나 해구에 위치한 태평양 바다에서 잠시 우리 밖 관객이 아닌 바다의 일부가 되었다.


꿀렁.


갑자기 바람이 세지면서 패들보드가 흔들렸다. 패들보드의 방향이 내 통제를 벗어났다. 노를 열심히 저어도 패들보드는 자꾸만 먼바다 쪽으로 향했다. 순식간에 멀어진 내 위치를 깨닫고 잠깐 두려움에 휩싸였다. 미지의 세계에서 도전하는 '처음'이라는 두려움이 갑자기 시퍼렇게 뒷목을 타고 온몸에 퍼졌다. 심호흡을 하고 조금 전에 패들보드를 처음 탈 때처럼 입으로 소리를 내며 노를 저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두려움에 굳었던 몸이 유연해지자 다시 노가 리듬감 있게 움직였고 시선의 정면이 리조트를 향했다. 그대로 리듬을 유지하며 노를 저어 다시 해변에 도착했다. 기다리던 시동생이 내 사진을 보여주며 농담을 건넸다. 


"패들보드 타고 괌까지 가려는 줄 알았네."


사진 속의 나에게서 두려움과 호기심, 도전하고 싶은 마음과 함께 아이의 설렘이 보였다. 패들보드에 우뚝 선 모습은 제법 당당해 보이기까지 했다. 사이판에 와서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이었다. 멈춰진 사진 속에 보드에서 일어서서 중심을 잡고 노를 젓는 모습이 보였다. 파도가 출렁이지만 흔들리지 않고 물결을 타는 내가 생동감 있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이가 들 수록 두려웠던 상황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겁도 많아지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두려움을 극복한 경험치가 만큼 용기도 자란다. 두려움은 과거나 미래를 향하지 않고 현재에 가장 강하게 느끼는 감정이다. 하지만 그 후 용기와 도전정신이 남는다. 패들보드를 타고 앞바다를 한 바퀴를 돌고 돌아오니 방금 전까지 다녀온 길 쯤이야 몇 번이고 혼자 다녀올 수 있을 듯 했다. 그 용기에 더해 한번 더 타고 싶다는 마음이 들썩였다. 


두려웠고 무서웠지만 시간을 지나 사진으로 만나는 내 모습은 온통 뿌듯하고 행복한 잔상들이다. 두렵기도 했고 용감했기도 했지만 두려워했던 나보다 용감했던 나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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