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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라이닝 May 10. 2024

모래밭의 훌라댄서

마음속 그렘린들에게

가끔은 우리가 상상한 대로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모래사장에서 훌라 스텝이 잘 안 되는 것처럼.


사이판의 밤바다가 보고 싶어서 식구들과 저녁식사를 마치고 바다로 나갔다. 등뒤에 비치는 리조트 불빛을 제외하고는 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칠흑같이 어두운 바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횟집과 노래방 간판의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우리나라 바다의 야경과는 사뭇 다른 고즈넉한 풍경이었다. 살면서 그토록 온전한 검은색 하늘을 처음 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몇 시간이고 돗자리를 깔고 누워 검은 하늘에 빠져들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식구들과 함께 있으니 적당히 시간을 보내고 들어가야 했다. 하품을 하는 아이들을 보니 곧 방으로 돌아가야 할 듯했다. 


"모래해변에서 밤바다를 배경으로 훌라를 추고 싶었는데 지금 잠깐 춰도 될까?"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훌라를 춰보고 싶었다. 여행 내내 파우(훌라치마)와 꽃핀은 언제든 나와 함께였으니 음악만 틀면 어디든 무대가 될 수 있었다. 그동안 보아온 수많은 훌라 영상들이 눈앞에 흑백 영사기처럼 촤르르 지나갔다. 드디어 여행에 오기 전에 내가 상상했던 바로 아름다운 장면이 펼쳐질 시간이었다. 달의 여신 히나(Hina)처럼 아름다운 훌라를 보여주겠어!


하지만, 인생 참 어렵다. 훌라가 내 맘대로 되지 않았다.


모래밭에 발이 푹푹 빠졌다. 


안 그래도 어려운 훌라 스텝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골반을 전혀 움직일 수가 없고 한 발 한 발 옮기는 데 급급했다. 온몸이 피노키오 인형처럼 삐그덕 뚝딱 거렸다. 보는 사람의 마음에 평화와 행복을 주기는커녕 어색하고 불편한 소용돌이만 일으키는 것 같았다. 그나마 함께 간 아이들 중 유일한 여자아이인 1학년 조카가 '이모 너무 예뻐요' 하며 옆에서 따라 하지 않았으면 중간에 멈출 뻔했다. 


어찌어찌 첫 모래밭 훌라를 마치고 돌아온 방에서 동서가 최대한 예쁘게 찍어준 영상을 보며 아쉬움을 삼켰다. 춤이라는 건 술과 같아서 시간이 지날수록 익어간다고 했는데 나의 훌라는 아직 발효가 되지 않았다. 여전히 뚝딱거리는 것을 영상에서 다시 한번 확인하니 괜히 부끄럽고 속상하기도 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더 열심히 연습해야지, 연습 열정도 불끈 솟았다. 


자려고 누웠는데 '넌 참 별로야. 아직 잘 추지도 못하면서 왜 췄어'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음속 그렘린들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예전 같으면 이들과의 말싸움에서 져서 나를 깎아내리는 데 동참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요즘의 나는 쓸데없는 걱정과 자책의 짐을 내려놓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여기는 사이판이니까, 예전보다 훨씬 여유롭고 당당하게 그들에게 맞섰다.


"어차피, 인생은 예기치 못한 일들의 연속이야. 누가 모래밭의 훌라가 이렇게 어려울 줄 상상이나 했겠어? 중요한 건 그런 상황에서도 늘 새로운 것을 배우고 성장하는 사람이 되는 거야. 모래사장에서 훌라를 추면서 발이 빠지는 것을 깨달았으니 다음에는 미리 스텝에 신경 써서 출 수 있을 거라고. 혹은, 오늘의 모래밭 강훈련 덕에 평지에서 훌라를 더 아름답고 안정적으로 출 수 있게 될지도 몰라!"


예상치 못한 일이 준은 당혹스러움, 준비되지 못했다는 자책,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는 불안,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 마음속 모든 그렘린들에게 모래밭의 훌라댄서가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내가 좋았으면 그만이지. 내가 뭐 누구 좋으라고 훌라 추는 줄 알아? 나를 위해 추는 거라고. 바로 나."


그렘린들을 재우고 다시 조금 전 보았던 밤 하늘 속으로 깊고 검은 잠에 빠져들었다. 밤하늘 아래 모래사장에 아까 훌라를 추던 내가 똑같이 어설픈 훌라를 추고 있다. 아까보다 훨씬 편안하게 웃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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