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실버라이닝 May 13. 2024

현실과 꿈의 모호한 경계

갑자기 탄 패러세일링


"지금이요? 이렇게 갑자기? 나우?"


보트에 탄 나와 동서, 조카와 내 아들 넷이 바다 한가운데에 멈춰 선 보트 위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현지인 선원에게 물었다.


"예스, 컴 히어"


그리고 그렇게 갑자기 패러세일링을 했다.





아침 일찍 조식을 먹는 둥 마는 둥 서둘러 가이드의 차에 올라탔다. 사이판 여행에 다녀온 지인들이 모두 한 입으로 추천하는 마나가하 섬에 가는 날이었다. 아침 첫 타임으로 섬에 들어가서 오전을 보내고 오후에 나오는 일정이었다. 섬에 가서 스노클링과 패러세일링을 하기로 해서 모두 설렘과 기대를 가득 안고 보트에 올라탔다.


보트를 타고 출발하자마자 광활한 바다를 보고 대자연의 아름다움 앞에서 입이 떡 벌어졌다. 보트엔 선장과 선원 두 명이 타고 있었는데 우리보다 더 느긋하게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매일 이런 바다를 바라보고 살면 나도 저렇게 느긋해질 수 있겠다 싶었다. 흥겨운 레게음악을 크게 틀어놓은 덕분에 다 같이 비트에 몸을 맡기고 살짝살짝 그루브를 타며 섬에 가는 길을 즐겼다. 온몸에 힘이 풀린 채로 넋 놓고 구경하고 있었는데, 선원이 건네주는 구명조끼를 보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여행에 오기 전에 예약하긴 했는데 섬에 가는 도중에 타게 될 줄은 몰랐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모호한 경계에서 놀고 있다가 갑자기 현실로 돌아왔다. 새파란 하늘과 더 파란 바다를 구경하느라 선크림 바르는 것도 잊고 있었는데, 구명조끼만 후다닥 입고 아들과 패러세일링 끈에 몸을 의지해 앉았다.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몸이 3초 만에 배를 떠나 하늘로 붕 떠올랐다. 낙하산이 펄럭이는 소리만 들릴 뿐 하늘은 고요했다. 아들의 등 위에 앉아서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목소리의 떨림으로 아들의 흥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엄마 저기! 마나가하 섬이야. 엄마! 아래 봐봐! 와, 거북이다 거북이!"


우리 발아래로 수면가까이 올라와서 왔다 갔다 하는 거북이 그림자가  보였다. 수심이 깊은 바다였지만 워낙 맑은 덕분에 산호가 있는 구역의 그림자가 선명했다. 산호구역은 파란 도화지에 커다랗고 검은 모양으로 그려낸 작품 같았다. 언뜻 보면 별 같기도 하고 꽃 같기도 했다. 자연이 만든 불규칙한 문양은 구름을 볼 때처럼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제일 높은 지점에 올라가자 잠시 시간이 멈췄다. 한 없이 가벼워진 채로 공중에 떠있었다. 잠시만, 잠시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조용하기를, 내 몸 하나만 가만히 어딘가에 떠 있어도 되기를 바랐던 시간들이 있었다. 무거운 삶 속에서 자주 바라던 그 꿈같은 순간이 지금 현실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공기 중에 내가 있는 것 같다가 없는 것 같았다. 옷을 입고 있는지 입고 있지 않는지도 느껴지지 않았다. 맨몸으로 물속을 유영하는 기분이기도 했다. 자주 꾸던 꿈처럼. 


순간, 또다시 현실과 꿈의 경계가 희미해졌다. 


살면서 현실과 꿈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들은 많았고 그 모든 순간들을 사랑했다. 앞이 보이지 않고 낙심했던 시간들 속에서 나를 버티게 해 준 것도 모호한 순간들이었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동안 작가나 예술가의 상상력이 현실과 꿈 사이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곤 했다. 덕분에 나는 답답한 현실에 사로잡히지 않고 영혼에 낙하산을 태워 공중에 띄울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예술작품은 어디에나 있어서, 산책을 하는 길에서도 모호한 순간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딴생각에 잠긴 채로 길을 걷는 동안 꿈속에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지나는 길마다 나를 괴롭히는 생각들을 허물처럼 벗어던졌다. 기시감을 느끼게 해 주거나 내 마음을 돌아보게 하는 영화나 뮤지컬, 책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모호한 경계사이에서 현실과 꿈이 혼합되며 때로는 답이 없이 무게만 가진 현실의 문제를 비현실적으로 사라지게 해주기도 했다.


여행을 핑계로 패러세일링을 타며 마음껏 현실과 꿈의 경계를 왔다 갔다 했다. 모호함이 주는 위로를 즐기며 현실의 무거움을 낯선 시각으로 바라보는 여유를 찾았다. 일상의 규칙이 안정감을 준다면 패러세일링처럼 갑자기 찾아오는 모호하고 황홀한 변칙은 삶을 가볍게 해 준다.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변칙적인 삶이 주는 재미를 제대로 즐길 줄 안다면 내 삶은 계속 가벼워질 수 있을 것이다. 

이전 11화 모래밭의 훌라댄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