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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라이닝 May 15. 2024

질투하면 지는 거야

마나가하 섬의 커플을 보며

사이판 마나가하섬 한쪽 끝, 키 큰 나무 아래에 돗자리를 폈다. 아이들이 스노클링을 하러 바다에 들어가고 혼자 남아 따뜻한 바람을 맞으며 새소리를 듣고 있었다. 잠시 후 2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커플이 두리번거리며 다가오더니 바로 옆 나무 그늘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늘 그래왔다는 듯, 자연스럽게 파란색과 흰색 줄무늬가 있는 상큼한 매트를 펼치고 앉아 서로의 등에 선크림을 발라주기 시작했다. 매트와 대조되는 빨강으로 색을 맞춰 입은 커플 수영복이 사이판의 들꽃처럼 싱싱했다.


징징 보채는 아이들을 달래느라 쉬지 않고 말을 하는 동시에 짐을 챙기는 우리와 다른 세계에 있었다. 둘은 물에 들어갈 채비를 하는 듯하더니 조용히 샌드위치를 꺼내 먹고는 매트 위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젊은 커플이 사이판의 섬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하는 모습이 부러웠다. 


잠시 내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과거의 내가 누리지 못한 모습이라서 부러웠다. 만약 젊음과 부유함 두 가지를 기준으로 행복한 순위를 매긴다면 젊고 부유한 사람이 1등, 젊고 가난한 사람이 2등, 늙고 부유한 사람이 3등, 늙고 가난한 사람이 4등일 거라고 혼자 생각하며 쓴웃음을 짓곤 했다. 지금 그 둘은 젊고 부유해 보였다. 젊은 시절 나는 젊고 가난했기에 그들이 누리고 있는 순간을 누려본 적이 없었다. 잠시 과거의 내가 그들을 질투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했다. 


그들에게 이 여행은 어떤 여행일까? 


나의 이번 여행이 무거웠던 삶을 가볍게 해주는 여행이라는 걸 그들이 짐작할 수 없듯 그들에게 이 여행이 어떤 의미를 주는지 나 역시 알 수 없었다. 직장과 가족,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무너진 멘털을 붙잡기 위해 선택한 여행일 수도, 인디언들처럼 언제 어디서 놓쳤는지 모를 자신의 잃어버린 영혼을 기다리는 시간을 가지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사실 나와 내 가족들처럼 치열한 시간을 보내고 잠시 숨을 고르러 온 시간일 확률도 높았다. 여행이란, 그런 순간에 더욱 절실해지는 법이니까. 


슬플 땐 슬퍼하고 춤출 땐 춤만 추고, 행복할 땐 행복하기로 해 놓고 나와 관련도 없는 사람들의 삶의 단편만 보고 지금 나의 행복을 또 놓치려 하고 있었다. 투병 끝에 엄마를 하늘나라로 보내드리고 어느 봄날 오후 지인을 만나러 익선동에 갔을 한가로운 오후를 즐기며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 부러워 화가 났던 날처럼. 자유로운 삶을 갈망하다가 드디어 잠여유 있는 시간을 허락받았는데 여전히 나는 누리지 못하고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다른 사람의 삶을 한 장면만 보고 부러워하는 나의 반쪽 뇌에게 반대편 뇌가 말했다. 여행에 와 있는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이지만 그들 삶 속으로 들어간 게 아닌 이상 함부로 그들의 행불행을 재단하고 짐작하고 나아가 과거의 나까지 소환하며 그들을 질투할 이유는 없는 거라고.


젊고 가난했던 아름다운 내 모습을 떠올렸다. 새벽 일출을 보러 대학 친구들과 정동진에 간 적이 있다. 모래알이 씹히는 라면을 끓여 먹으며 구름 사이로 애매하게 떠오르는 해를 함께 보았다. 별것도 아닌 썰렁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배꼽을 잡았던 시절. 마나가하 섬의 온도보다 뜨거웠던 시간을 가졌던 과거의 내가 여기 이 커플을 부러워할 이유가 없었다. 잠시 충분히 행복해하고 있는 젊은 나를 소환해서 행복하지 않은 것처럼 포장한 것이 미안해서 씩 웃었다. 다행이었고 고마웠다. 떠올릴 행복한 순간들이 있어줘서.


삶을 단순하게 보려 했던 나의 어린 자아에게 삶은 생각보다 복잡하다고 말해주었다. 모두가 동시에 힘들게 살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별처럼 힘든 순간들이 떴다지며 이 세상이 유지되고 있다. 매 순간 누군가가 태어나고 죽는 것처럼 모두의 힘든 순간과 행복한 순간이 깜빡이는 모습을 그려본다. 아름다운 장면엔 언제나 슬픔이 있다는 어느 작가의 말처럼 모든 삶의 복잡함과 아름다움이 모여 세상을 채우고 있다. 그날 마나가하 섬에서도, 여기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어느 카페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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