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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라이닝 May 16. 2024

훌라가 공연이 될 때

내 관객이 되어주어 고마워

사이판 북쪽에 위치한 작은 산호섬, 신이 유화로 그려낸 듯한 마나가하 섬은 빛의 화가들도 부러워할 만한 한 편의 작품이었다. 섬을 둘러싼 바다는 다양한 열대 해양 생물이 살고 있는 거대 수족관이 되어 관광객들을 초대했다. 모래사장에 발을 담그면 방금 맷돌에서 갈아 마찰열을 간직한 듯 따뜻하고 고운 모래가 발가락을 감쌌다. 바닷물과 닿는 해변에서 육지 쪽으로 몇 걸음만 들어오면 내 키만 한 나무와 초록 풀들이 자라고 있었고, 키 큰 코코넛 나무에서 떨어진 코코넛들이 굴러다니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이 스노클링을 하러 들어간 사이 잠시 그늘에서 쉬며 열기를 식힌 후 드디어 마나가하 섬에 온 목적을 달성하려 몸을 일으켰다. 왼쪽 귀 위에 하와이 꽃핀을 꽂고 등에는 파우를 담은 파우 가방을 사선으로 둘러맸다. 한 손에 핸드폰을 다른 손에는 핸드폰 거치대를 들고 모래밭을 둘러보며 훌라를 추며 촬영도 가능한 곳을 찾아보았다.


모래밭 위에 듬성듬성 아이 머리칼처럼 부드럽게 솟아 있는 풀들 사이로 작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군락을 발견했다. 내 몸이 오른쪽 왼쪽 앞뒤로 다섯 발자국씩 움직여도 될만한 지 확인한 후, 모래밭에 거치대를 푹 꽂고 핸드폰 비디오 화면을 켰다. 내가 내 모습을 볼 수 없으니 나무들의 위치로 대략 짐작만 하고 가운데 서서 카메라를 바라보고 자세를 잡았다.


핸드폰이 하나뿐이라 음악을 틀 수 없는 것이 유일한 아쉬움이었지만 괜찮았다. 내가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추면 그만이었다. 훌라 음악은 어차피 저 먼바다에서 시작되니까, 파도소리에 귀 기울이며 추면 된다고 생각하고 또 그 생각에 스스로 감탄해서 '캬~'라고 외쳤다. 모래밭 위에 훌라의 깊고 넓고 자유로운 마음, '알로하'를 불러들이기 시작하고 첫 동작을 준비했다. 음악과 거울이 없는 곳에서 추는 훌라는 오히려 더 자유로웠다. 나만의 박자에 맞춰 출 수 있었고 양팔의 각도에 신경 쓰거나 다른 댄서의 춤과 비교하지 않아도 되었다. 자꾸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무장해제하고 실컷 훌라와 웃음을 토해냈다.


그때 저 멀리 한 한국인 가족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엄마와 아빠로 보이는 어른 두 명은 나를 못 본 척하며 열심히 가던 길을 갔는데 아이는 굳이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촬영하는 중인데, 아이가 화면에 잡히겠네'하고 잠시 걱정이 되었지만 이런 낯선 상황들이 재미있기도 해서 훌라도 촬영도 멈추지 않았다.


아이는 음악도 없이 혼자 춤추는 아줌마가 신기했는지, 아니면 자신이 보는데도 훌라를 멈추지 않는 내가 신기했는지 끝까지 서서 내 훌라를 지켜보았다. 처음엔 궁금해서 나중엔 재미있어서 지켜보는 것 같았다. Pearly Shells를 다 추고 아이를 바라보니 아이가 씩 웃고는 혹시 내가 말이라도 걸까 봐 두려웠는지 쑥쓰러운 표정을 하고 엄마 쪽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아이 덕분에 나의 훌라 촬영이 작은 공연이 되었다. 그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몰입해 주어 추는 나도 두 배로 집중하며 출 수 있었다. '잘가요, 나의 첫 관객님.'


아이가 지나가고 방금 전 공연의 실수를 보완해서 한번 더 추는데 이번엔 새로운 관객이 등장했다. 저 멀리 바닷가를 지키는 전망대에서 현지 가드분들이 박수를 쳐주었다. 나도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니 '브라보!'라고 외쳐주었다. 다시 음악 준비. 입으로 흥얼흥얼 파도소리에 맞추어 Kona Moon을 부르기 시작했다. Kona Moon 은 방금 춘 Pearly Shells 보다 훨씬 느린 곡이었다.


오늘만큼은 다른 댄서의 동작이 아닌 파도와 바람의 동작을 따라한 덕분이었을까? 늘 동작을 외우는 데에 급급해서 다음 동작을 떠올리느라 지금 추는 동작에 여유를 담지 못했는데 무용연습실이 아닌 바닷가 모래밭에서 추니 절로 동작이 느려졌다. 곡이 끝나자 멀리서도 어떻게 알아차리고 전망대 꼭대기에서 다시 박수 소리가 들렸다. 나도 다시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치켜들어 손을 흔들며 '샤카 사인'을 보여주었다. 낯선 사람들과 훌라로 교감한 두 순간이 행복했다.


마나가하 섬에서 우리는 작은 연결고리를 하나 만들었다.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고 엇갈리게 끼워 걸듯 모래밭에서 서로의 경험이 겹쳐진 순간이었다. 나에게도 특별한 추억이 된 것처럼 그들에게도 재미있는 순간이 되었기를 바랐다. 아이에겐 춤에 대한 자연스러운 호기심과 훌라 동작에 대한 작은 궁금증이 생기는 시간이었기를, 가드에게는 그가 일하는 공간에서 어떤 이가 행복을 찾고 누릴 수 있음을 알고 함께 뿌듯해했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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