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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라이닝 May 14. 2024

잡음을 제거 하면 들리는 나

마나가하 섬 바다에 얼굴을 담그고


섬 옆의 더 작은 섬, 마나가하 섬에 도착했다. 많은 관광객들로 북적였지만 섬은 고요했다.


아름다운 자연경관 앞에서 사람들은 입보다 눈이 바빴다. 수많은 관광객이 섬을 채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요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혹여 대화를 나누더라도 우주처럼 넓게 뚫려 있는 공간 속으로 소리가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이 작은 섬에는 사람과 소음을 담을 건물마저 없었던 탓에 소리도 머물 곳이 없어 보였다.


오랜만에 외부세계와 단절된 느낌을 받았다. 섬은 도시의 소음과 복잡한 풍경에서 벗어나 철저하게 평화로울 것을 요청하고 있었고 나는 순응했다. 도시의 잡음이 사라지자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꽃잎은 공중으로 꽃가루를 퍼뜨리고 육지게가 달그락 거리며 작은 오솔길을 지나갔다. 파도는 자기만의 박자에 맞춰 다가오가다 물러서기를 반복했다. 투명한 물에 발을 담그자 엷은 파도를 타고 온 모래가 발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 들어가도 돼요?"


아이들은 수족관 안의 다이버처럼 물속에서 물고기들과 놀 거란 생각에 한껏 들떠 있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어른들을 끌어당겨 기어이 바닷물로 데리고 들어갔다. 나는 연장자 대우를 받아 자리에 혼자 남을 수 있었다. 자리를 정리하고 잠시 숨을 돌렸다. 아이들의 조잘거리는 소리마저 사라지자 새소리가 볼륨을 높였다. 돗자리 주변 나무에 수십 마리 새들이 앉아 지저귀고 있었다. 분명 아까부터 있었는데 이제야 들리는 새소리를 깨닫고 내가 그동안 듣지 못했을 소리들을 생각했다. 주변의 잡음 때문에 놓쳤을 아름다운 소리들을 이제는 잘 들어야지.


"엄마, 엄마도 빨리 가자. 물고기 진짜 진짜 많아."


순식간에 고요 모드 오프, 다시 아들 엄마 모드 온. 엄마와 같이 스노클링을 하고 싶은 아들 성화에 첨벙, 바다에 뛰어들었다.


'그래, 아들과 함께 있을 때는 내 소리보다 재잘재잘 사랑스러운 잡음을 들어야지.'


어느 곳이든 고개를 숙여 얼굴만 집어넣으면 산호와 물고기 떼들이 보였다. 새끼손가락 손톱만 한 물고기 떼가 큰 물고기 한 두 마리를 따라다니는 모습은 나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순식간에 귀여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또 다른 물고기가 등장하자 뮤지컬 같은 이야기가 떠오르고 그 장면에 어울리는 배경 음악이 들리는 듯 했다. 스노클링 마스크에 물이 차서 잠시 일어나면 공연이 멈췄다가 다시 얼굴을 물속으로 들이밀면 다음 스토리로 이어졌다.


산호가 많아 혹시 넘어져 다칠까 봐 아들 손을 꼭 붙잡고 떠다녔다. 그런데 그게 불편했는지 어느 정도 스노클링에 익숙해지자 아들이 혼자 돌아다녀보겠다고 제안했다. 사실 나도 혼자 둘러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부표 바로 근처까지만 가도 훨씬 다양한 종의 물고기들을 볼 수 있었다. 혹시나 파도에 휩쓸려 부표를 지나갈 까 싶어 아들과는 멀리까지 가지 않았는데 나 혼자이니 한번 가보기로 했다. 부표 근처에 다가가자 물이 꽤 깊어졌다. 그런데 물이 워낙 투명해서 저 멀리 깊은 바다와 거기서 돌아다니는 물고기 들까지 다 보였다. 내가 떠 있는 곳에서 시작된 바닷길은 저 멀리 끝도 없이 양팔을 벌리며 넓게 퍼져나갔다. 그곳에서 아주 오래 멈춰 있었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주변에 사람이 없으니 물방울이 뽀글거리는 소리나 작은 물결이 부딪히는 소리도 없었다. 최근 주변에 프리다이빙을 하는 친구들이 마치 명상을 하는 것 같다며 나에게도 추천했었는데 이런 기분때문이 아니였을까 짐작했다. 내면에 찾아온 평화가 주는 힘 덕분이었을까, 물밖에서는 숨 참기가 힘든데 물속에서는 조금 더 오래 참을 수 있었다. 물속에 있을 때처럼 삶의 잡음을 제거하면 좀 더 평화롭게, 나에게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돗자리에서 갑자기 듣게 된 새소리처럼 다른 볼륨을 줄이면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텐데.


최근 온라인 인간관계에서 작은 소음을 느끼던 차였다. 죽어 있는 여러 개의 단톡방에서 아주 가끔 관심 없는 소식이 올라올 때마다 읽지도 않고 지우는 일이 반복되었다. 오랫동안 온라인에서 알고 지내며 인사치레로는 더없이 친한 사람들처럼 댓글을 남기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따로 안부 인사 한번 하지 않고 의미없는 메시지를 주고 받는 관계 속에서 나는 점점 산만해졌다. 며칠 전 결단을 내리고 여러 개의 단톡방에서 나왔다. 나에게 집중하기 위한 극단의 처방이었다. 어떤 이는나의 용기가 부럽다고 마음에 힘을 보내주었고 예상대로 수많은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특별한 연락 없이 지나갔다.


그 후로 나의 일상이 꽤 고요해졌다. 처음엔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시작한 관계였고 서로에게 최선을 다했지만 give and take의 논리에 지배당해 점점 무의미한 일들에 시간을 썼다. 불필요한 에너지를 멈추니 소음이 줄었다.


정신이 없는 어떤 날이면 잠시 숨을 들이 마시고 마나가하 섬 물속에 얼굴을 넣고 물에 뜨는 상상을 한다. 잠시, 잡음을 제거해본다. 나에게 집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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