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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라이닝 May 03. 2024

무한의 페이드 아웃

사이판 북쪽 수평선

리조트에서 차를 타고 약 30분간 도로를 달렸다. 5분 쯤 지난 후부터 왼쪽에 보이던 바다가 보이지 않고, 양 옆으로 열대우림의 나무들이 우리를 호위했다. 사이판 섬의 북쪽 끝에 도착하자 눈앞에 지구의 푸르고 둥근 가로줄이 하나 나타났다. 줄은 세상을 하늘과 바다 딱 둘로 나누었다. 


어렸을 때 학교 미술시간에 바다를 그릴 때면 나만의 패턴이 정해져 있었다. 스케치북에 가로 수평선을 일자로 죽 긋고 윗부분엔 하늘, 아랫부분에 바다를 그렸다. 하늘에는 갈매기 두 마리와 구름이 떠있고, 바다에는 물고기 서너 마리와 해초가 흔들거렸다. 바위 위엔 조개와 불가사리, 거북이 한 마리가 있었다. 


사이판 북쪽 끝 주상정리가 우뚝 서있는 눈앞의 바다는 내가 그리던 그림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푸른색은 바다의 표면색을 생략하고 곧바로 심해의 짙푸른 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그린'의 투명한 청록색과 완전히 다른 '파워에이드'의 힘찬 파랑이었다. 


수평선도 일자가 아닌 둥근 타원형이었다. 한국에서 보던 수평선은 아무래도 양쪽에 시야를 가리는 산이나 도시가 있기 때문에 가로길이가 짧아서 타원형을 느끼기 전에 선이 끝난 건 아닐까 추측하던 즈음 여행 가이드가 설명을 시작했다.


사이판 북쪽과 동쪽 주변의 바다 색이 이토록 푸른 이유는 사이판이 지진의 결과로 우뚝 솟아 오른 섬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해변이 거의 없고 곧바로 주상정리의 절벽으로 땅과 바다의 경계가 이루어져 있으며 심해 바다 한가운데 솟은 섬이라 주변의 수심이 깊다는 것이다. 


또한 지구의 적도 주변에 있는 섬이라 수평선이 평평하지 않고 둥근 모양을 하고 있다고 했는데 이 부분에서 우리는 잠시 멈칫했다. 뭔지 알 것 같으면서도 과학적으로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음을 서로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해구까지 보일 것 같은 깊은 바다와 싹둑 잘린 순간이 상상되는 주상절리 절벽의 경이로움 앞에서 누구도 과학적 이론을 자세히 파고들지 않으려는 듯했다. 모두 잠시 좌뇌를 잠그고 우뇌로만 풍경을 감상했다.


가이드의 설명이 끝나고 조용히 바다멍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각자 사진을 찍고 싶은 곳을 한 바퀴 돌아보고 오라는 말에 모두 벼랑 끝 난간으로 달려갔다.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며 잠시 각자만의 공상에 잠겼다. 


나에겐 수평선 끝을 향해 끝없이 흘러가고 있는 물소리가 들렸다. 0이 되지 못하고 영원히 0으로 수렴하기만 하는 바닷물들이 끝없이 수평선을 지나 아래로 흘러내려갔다가 다시 지구를 돌고 돌아왔다. 선은 무한과 유한의 경계, 이 세상과 하늘나라의 경계를 뚜렷이 나누지 못하고 모호하게 그러데이션을 그리며 가로로 퍼져있었다. 우주의 거대한 존재가 여기 수평선을 사진으로 찍어 두 손가락으로 확대해 본다면 분명 정확한 선이 아닌 겹쳐진 면적이었을 것이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엄마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 병실이 잠시 진공상태가 된 듯 했다. 엄마는 시선을 나에게 고정한 채 먼 우주 공간으로 떠가고 있었다. 영상효과의 마지막 페이드아웃처럼 서서히 희미해졌지만 결코 0이 되지 않았다. 무한의 공간에서 지금도 최저 속도로 페이드아웃되고 있는 중일 것이다. 조금씩 사라지고 있지만 여전히 존재한다. 


공상의 시간이 짧은 아이들 덕분에 다시 절벽이 소란스러워졌다. 사이판 북쪽 끝, 수평선을 한번 더 바라보며 모호한 경계에서 엄마에게 인사를 건네고 다시 나의 뚜렷한 세상으로 몸을 돌렸다. 깊고 푸른 역사 이야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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