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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라이닝 May 01. 2024

여행은 조식이지

모두가 행복한 곳, 호텔 뷔페

엄마는 식구들이 다 같이 먹는 식사를 좋아했지만 나는 혼자 먹는 걸 선호했다.


워낙 느리게 먹는 식습관도 한 몫했지만 먹을 때만큼은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롭고 싶었다. 육아를 하는 동안 가장 힘들었던 걸 꼽으라면 단연코 자유롭게 식사하지 못했던 날들이 1등이다. 가끔 하는 외식도 '밥, 코로 먹으러 가볼까?'라고 농담을 하며 갔다. 겨우겨우 정신없이 먹고 나면 '설거지만 안 한다뿐이지 힘든 건 매한가지네' 하고 후회하곤 했다. 


아이들이 크고 한숨 돌리려니 편찮으신 엄마의 식사를 챙겨야 했다. 엄마가 20년간 했던 신장투석은 에너지 소모가 많고 사람마다 통증의 종류와 정도가 달랐는데 엄마는 어지럼증과 두통이 심했다. 특히 투석이 끝나면 배가 많이 고프기 때문에 오전에 신장투석을 하고 12시경에 끝날 즈음 차로 모시고 와서 오자마자 식사를 하시도록 준비했다. 엄마는 투석을 하고 오자마자 먹는 밥이 제일 맛있다며 늘 없던 기운을 끌어내며 열심히 드셨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어지러워하는 날이 많아졌고 점점 평화로운 식사가 어려웠다. 야속하게도 내 본능은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아픈 엄마 앞에서 짜증을 내려해서 그 마음을 억눌렀는데 나도 모르게 억울함과 답답함이 위장 아래로 쌓여갔다. 가끔 너무 배가 고픈 날은 엄마 컨디션이 좋아질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엄마 옆에서 먼저 먹었는데 엄마가 소파에 누워 앓는 소리를 내면 내 입안의 밥은 모래알보다 건조하고 껄끄러웠다. 


엄마는 취향이 확실한 사람이라 메뉴에 대한 고집도 확고했다. 유방암 진단을 받기 전 아이 둘을 데리고 엄마와 경주로 1박 2일 여행을 갔다. 가기 전에 지인들에게 물어 맛집을 검색해 놓고 동선에 맞춰 식사를 계획해 두었다. 유명하다는 떡갈비 집에서 먹은 점심은 나름 모두를 만족시켰다. 하지만 저녁을 먹으려는데 엄마와 손주들 사이에서 메뉴논쟁이 벌어졌다. 어느 누구도 한 치의 양보 없이 각자 먹고 싶은 메뉴를 말했고 마지막엔 아이들과 엄마, 그러니까 아이들 입장에서 외할머니와 대결구도가 벌어졌다. 결국 어느 누구도 양보하지 않았고 우리는 '김밥천국'으로 향했다. 경주까지 와서 김치볶음밥과 돈가스에 순두부찌개라니. 평범한 점심도 여행에서의 음식도, 엄마와의 식사는 그렇게 늘 고민의 연속이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여행은 조식이지! 뷔페 먹으러 가자!"


사이판 여행 첫날 아침, 내가 제일 좋아하는 조식뷔페를 먹으러 갔다. 엄마와 힘들었던 점심식사들, 메뉴 통일이 힘들어 괴로웠던 날들을 뒤로하고 모두가 행복한 곳, 호텔 조식 식당으로 향했다. 타지 음식에 입맛이 안 맞는 어른도, 아직 잠이 덜 깬 아이들도 모두 각자가 좋아하는 음식이 적어도 1개 이상은 있을 터였다. 


불만 섞인 투정을 들을 일도, 누군가의 눈치를 볼 일이 없었다. 어느새 많이 자란 아이들은 제법 알아서 각자의 접시를 채워왔다. 사실 아이들도 그동안 부모님과 선생님 눈치 보며 먹었을 때보다 훨씬 자유로운 이 시간이 얼마나 행복하고 기뻤을까? 여행이란 건 어른들이 아이들 메뉴에 대해 관대해지게 하는 마법을 부렸다. 아이들 접시에 편식습관이 그대로 드러났지만 모르는 척 넘어가주었다. 세 접시째까지 좋아하는 치킨만 담아 오는 아이, 파스타만 계속 담아 오다가 배불러서 한 접시를 다 남긴 아이, 두 접시째부터 케이크와 과자로 가득 담아 온 아이에게도 눈으로는 따가운 시선을 보냈지만 입으로는 '그래, 여행이니까' 하는 표정으로 웃어주었다. 다만 우리 식구들만 있는 게 아니니 아이들에게 기본 식사 예절을 알려주고 혹여 맛있는 음식 앞에 너무 흥분해서 사고가 나지 않도록 주의를 주었다. 아이들도 집에서보다 조금 더 커진 자유 앞에서 부푼 풍선이 터지지 않도록 적당한 바람을 불어넣는 법을 알기를 바랐다.


"누나 시원하게 얼음물 한 잔 해."


샐러드부터 한 접시 먹고 본 음식을 먹으려는데 시동생이 얼음물이 담긴 투명한 컵을 건네주었다. '벌컥' 마시는 데 눈이 번쩍 뜨였다. 눈빛교환. 시동생이 어느새 소주에 라임을 짜 넣고 얼음을 가득 담아 시원한 라임소주칵테일을 만들었다. 여행이니까. '낮술' 아니 '모닝소주' 한잔, 뭐 어떤가! 내 위장에게도 타이트했던 다이어트 식단의 긴장을 풀고 느슨하게 부풀어보라고 윤활유를 흘려보내주었다. 어른들끼리만 '찡긋' 눈인사를 하고 '특제 사이판 얼음물' 잔으로 건배를 하고 벌컥, 사이판의 여유를 마셨다. 내 몸이 감각하는 모든 게 감사했다. 



식사를 마치고 배가 빵빵해진 채로 식당 앞에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았다. 한국에서 사이판까지 거리만큼의 자유를 느꼈다. 아이들을 키우고, 편찮으신 엄마를 돌보아 드리던 시간을 지나 누린 조식 시간. 사이판에게 감사의 키스를 해주고 싶은 마음을 담아 내 아이의 얼굴을 붙잡고 뽀뽀를 했다. 


"맛있게 잘 먹었어? 우리 이제 신나게 수영하러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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