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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라이닝 Apr 29. 2024

여행 가방에 내가 있다

기뻐하고 예민할 준비 완료

사이판으로 떠나는 날은 일요일 오후였다. 혹시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토요일에 준비할 마음으로 여행 2일 전인 금요일에 짐을 쌌다. 환전만 서둘러 마쳐놓고 캐리어 두 개를 꺼냈는데 시작과 동시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여행 자체가 오랜만이라 무엇부터 챙겨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갑자기 여행이 가기 싫어지기까지 했다. 여행 짐 앞에서 예상치 못한 불안함과 무기력이 찾아왔다.



언제부터였을까. 항상 닥쳐올 불행에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저 마음 밑바닥에 깊고 넓게 깔려 있었다. 그러니 늘 몸은 현재에 있지만 마음은 가까운 미래에 가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의식은 현재에, 무의식은 미래에 있으니 나라는 빙하는 언제나 뒤집어지기 직전이었다. 내 존재가 전복되지 않기 위해 빙하 아래의 불안을 꾹 누르며 살았다. 불안의 또 다른 이름은 잡념이었다. 잡생각이 많아 힘들었던 나는 생각의 가지치기를 막기 위해 인생의 모토를 '중심만 잡자'로 정했다. 때로 빙하가 갈라지고 녹아서 조각이 떨어져도 전체가 흔들리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 일만 생각했다.



그런데 중심만 잡는 삶은 작고 사소한 것들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예민함을 피하기 위해 선택한 둔감함은 디테일을 놓치거나 작은 실수들을 자주 일으켰고 주변인들이 그 구멍을 메꿔주어야 했다. 나는 예민하고 불안했으나 사람들의 눈엔 둔감하고 태평한 사람이 되었고 손이 많이 가는 덜렁이가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 스스로도 그 모습에 익숙해졌고 비겁하게 되려 그 평가에 기대어 조금은 게으르고 편하게 살아왔는지 모른다.



문득, 둔감한 성격이 처음엔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지만 점점 핑계가 되어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게 뭐라고 여행 짐 앞에서마저 그 핑계를 대고 무기력해져 있는 걸까. 그리고 둔감함이 생존의 문제라고 해도 이제 내가 살아갈 생이 바뀌었다. 더 이상 친정엄마를 간병하는 삶이 아니지 않은가. 나는 다시 내 삶의 방식에 적응해야 했다. 더 이상 '중심만 잡는' 삶이 아니라 조금씩 주변을 더 살피고 세심해져야 할 때였다. 나에게는 이제 엄마의 간병에 쏟았던 에너지가 남을 테니까.



무기력에서 벗어나니 짐 싸는 건 일도 아니었다. 여행일정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하나씩 챙기기 시작했다. 꼭 필요한 것과 혹시 필요할지도 모르는 것, 중요도의 순서에 따라, 그리고 나의 기대와 바람의 크기에 따라 물건이 하나씩 자리를 차지했다.



부지런히 짐을 싸고 캐리어 안의 내용물을 살펴보았다. 여행 가방 안에 내가 보였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온통 아이들 물건뿐이었고 엄마와 함께 하는 여행에서는 약과 편한 옷들이 가득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커다란 캐리어에 매일 갈아입을 내 원피스와 알록달록한 튜브탑, 반바지와 비키니가 가득했다. 거기에 해변에서 훌라를 출 때 입을 파우 다섯 벌과 각 파우에 어울릴 꽃핀까지. 드디어 내 인생에서 아이들과 친정엄마가 빠지고 내 모습이 드러났다.



여행짐을 싸기 전에 잠시 머뭇거렸던 건 홀가분해진 나와 만나기 전의 두려워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마음껏 기뻐할 나를 만날 준비에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이제는 무딘 사람인 척 살아가지 말고 예민함을 있는 그대로 꺼내어 느끼고 표현하며 살아도 된다는 신호 앞에서 망설임에 한 번의 신호를 보내고 다음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호텔에 도착하고 캐리어를 열었다. 다음날 아침 처음으로 입을 옷과 비키니를 꺼내 머리맡에 두고 잠이 들었다. 마음껏 기뻐하고 예민할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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