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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라이닝 Apr 26. 2024

가도 될까, 사이판

죄책감과 설렘 사이

남편과 고등학교 동창인지라 워낙 어려서부터 보아온 시동생은 나를 여전히 누나라고 부른다. 친정엄마 장례식을 치르고 얼마 후 시동생에게 카톡이 왔다.


"누나, 우리 사이판 여행 가자."


사이판.


친정엄마를 간병하느라 오랫동안 1박 이상의 여행을 꿈꾸지 못했다. 새벽 일찍 첫차를 타고 막차로 돌아오는 당일 여행이 최선이었기에 해외여행이란 말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가도 될까, 사이판?'





죽기 전에 호캉스를 해보고 싶다던 엄마를 모시고 영종도의 한 호텔에 다녀온 게 엄마와의 마지막 1박 여행이었다. 월수금에 신장 투석을 하셔야 해서 1박 이상은 힘들었던 엄마에게 3일 같은 1일 여행을 시켜드리고 싶었다. 야속하게도 날씨요정은 우리에게 와주지 않아 비바람이 몰아쳤지만 다행히 엄마가 호텔 사우나를 마음에 들어 하셔서 1박 2일 중에 3번이나 사우나를 함께 했다. 엄마는 장기간에 걸친 투석 때문에 울퉁불퉁해진 혈관과 최근 생긴 암수술 자국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싫어하셨는데 다행히 평일여행이라 사람이 없어서 편한 마음으로 사우나를 즐길 수 있었다. 낮고 작은 소리로 속삭여도 잘 들리는 공간에서 엄마와 나는 날씨이야기부터 아이들 이야기, 인생에 대한 철학까지 다양한 주제를 나누었다. 그 시간을 생각하면 야외스파에서 불던 바람에 나뭇잎들이 흔들리던 장면과 함께 엄마가 천천히 일어날 때 욕탕 안 물이 가볍게 찰랑거리던 소리가 함께 들린다. 그 후로 엄마의 암치료가 원활하지 않았고 결국 호스피스 병동에서 엄마를 하늘나라로 보내드렸다.



장례를 치르고 오랜만에 되찾은 일상은 객관적으로 보면 행복하고 감사할 일로 가득했다. 아이들은 건강하고 밝게 학교생활을 했고 남편도 자상하게 나를 챙겨주었다. 오랜만에 일도 하지 않고 돌볼 사람도 없었던 나는 여유롭게 오전에 집안일을 하고 강아지와 산책을 했다. 오후엔 운동을 하고 밤에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온라인 독서모임을 했다. 하지만 왠지 모를 불안함과 죄책감이 자꾸 일상의 기쁨을 억누르려 했다. 충분히 기뻐하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고 있을 때 시동생이 해외여행을 제안해 주었고 나는 겉으로는 초등학생 아이 핑계를 댔지만 사실 나를 위해 가보기로 결정했다.



최근 직장에서 팀을 옮긴 남편과 예고에 진학해 첫 학기를 보내고 있는 딸은 집에 남기로 했다. 그렇게 초등학교 4학년인 아들과 나만 시동생 가족과 함께 여행을 떠났다. 여행에는 우리 말고 한 가족이 더 있었다. 동서의 여동생, 그러니까 나와는 사돈관계였다. 남들이 보기엔 어색할 수 있는 조합이지만 우리는 그 어떤 가족과도 편한 사이였다. 서로 연애를 할 때부터 지켜봐 온 사이이기도 했고 워낙 다들 성격이 좋아 허울 없이 잘 지내는 사람들이었다. 제주에 사는 사돈네는 우리가 제주 여행을 가면 내내 우리에게 아이들 방을 내어 주고 맛집 예약을 해두는 가족이었다. 그러니 이 멤버들과 함께 여행을 한다고 하면 망설일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더 좋아서 가고 싶어지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여행을 일주일 정도 앞두었을 때 나는 여전히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엄마가 살아 계실 때의 불안함이 관성처럼 몸에 남아있어서인지 혹시나 여행계획을 말하면 누가 다치거나 안 좋은 일이 생겨 여행을 못 갈 것 같은 마음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들은 달랐다. 이미 한 달 전부터 학교 선생님과 학원 선생님들은 물론 주변의 친구들과 어른들께 다 말했다고 했다. 옆 동네 학교 전교생까지 다 알겠다며 농담을 건네시는 피아노 학원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아들이 얼마나 이 여행을 기대하고 있는지 느껴졌다. 이미 유튜브 알고리즘은 사이판 여행 관련 영상으로 가득했다. 하루는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안방에서 아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이판 스노클링 갈만한 곳!"

"사이판 맛집!"

"사이판에 사는 동물!"


아들이 유튜브 음성인식으로 열심히 사이판 정보를 알아보고 있었다. 아들의 기대감을 채워주기 위해서라도 이번 여행은 꼭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들 덕분에, 나는 두려움과 걱정을 조금 뒤로하고 꼭 여행을 가야 할 이유를 찾았다.





오랜만에 찾은 인청공항은 여전히 활기찼다. 전날 밤잠을 설친 사람도 좋은 컨디션을 유지한 사람도 구분되지 않고 모두 행복해보이는 곳, 공항의 출발 게이트였다. 여권을 손에 든 아들은 이제 정말 가는 거 맞냐고, 너무 떨린다며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올리고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뱉기를 반복했다. 사실 나도 그랬다. 너무 설레고 떨리고 기뻤다. 막연한 두려움과 죄책감에 가려진 기쁨이 커튼 뒤에서 조용히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나, 드러내도 될까?'


'나, 사이판에 가도 될까?'라는 질문은 어쩌면 '나, 기뻐해도 될까? 마구 행복해도 될까?'라는 질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갑자기 찾아올 불행에 압도당할까 봐 무서워서 미리 적당히 기뻐하는 법에 익숙해졌던 나의 감정에게 이번 여행이 '기쁜 만큼 기뻐하는 법'을 알려주기를 바랐다.


"누나, 나도 이렇게 일 오래 쉬는 거 오랜만이야. 사실 마음속으로는 일 걱정이 태산인데, 이왕 가는 거 즐기려고 일부러 일 생각 안 하고 있어. 누나도 즐겨, 알았지?"


시동생은 내 눈빛에서 무언가를 읽은 듯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자신에게도 비슷하게 맴돌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 말에 나는 공감과 힘을 얻어 조금 가벼워진 채로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비행기는 아들의 시끄러운 설렘과 나의 조용한 설렘을 동시에 안고 공중으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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