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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필작가 Feb 24. 2021

입학 분투기

Bravo, my life!(3)

 열한 살 때, 아버지가 서당에 다니라고 하셨다. 우리 종중에서 운영하는 서당이 있는데 무료로 한문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께 천자문 한 권을 배웠고 윗집의 유양천이라는 분께 가타카나와 1학년 국어 책을 배웠기에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서당에 가보니 애들이 허리를 구부렸다 폈다 하며 책을 읽는 게 이상해 보였고 다른 애들은 글을 가르치면서 나는 마냥 앉혀 두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슬그머니 일어나 집으로 왔다. 아버지가 왜 벌써 왔냐고 하시기에 글을 안 가르쳐 주어서 왔다고 했더니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나는 서당 말고 학교에 가고 싶다고 했다. 가방을 매고 신식 학교에 다니는 애들이 부러웠다. 아버지는 잠시 생각하시더니 그러라고 하셨다.

     

 다음날 아버지는 소강학교에 다니는 희돈이라는 아이에게 언제 입학할 수 있는지 등을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희돈이가 바로 내일 가면 된다고 해서 아버지와 함께 그 다음날 바로 학교에 갔다. 많은 애들이 넓은 운동장에서 철봉에 매달리거나 턱걸이 운동을 하면서 노는 게 보였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버지를 따라 학교 직원실에 들어가니 학교 교장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시험을 봐야 한다며 더하기와 뺄셈 문제를 풀게 했다. 문제를 풀고 나니 슥 보더니 시험은 합격인데 기부금 10원을 내야 한다고 했다. 쇼와 11년(1936년)에 10원은 큰돈이었다. 송아지 한 마리에 4원 정도에 면 서기 한 달 월급이 8원인가 할 때였다. 


 아버지가 당장 그런 큰 돈은 구하기 힘드니 5원만 내면 안되겠냐고 하자 교장의 안색이 변했다. 5원도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지만 아들의 기대를 꺾는 일이 더 힘들었던지 아버지는 10원을 내겠다고 했다. 그러나 교장은 빈정이 상한건지 돈을 더 받으려는 건지 거절했다. 이깟 학교 다니래도 안 다닌다며 박차고 일어났는데 직원실을 나서자마자 울음이 터졌다. 마침 지나가던 분이 왜 우냐며 다정하게 물어보셨다. 알고 보니 소강 보통학교를 나와 우리나라에서 원산과 창린도 두 곳에만 있던 수산학교를 졸업하신 안상기라는 분이셨다.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낯도 이름도 모르던 집안 분이었다. 안 선생님은 ‘얘, 내가 장포리에 있는 육영학교 선생이란다. 울지 말고 우리 학교 다녀라’고 나를 달랬다. 온화한 목소리에 설움이 잦아들었다. 


 다음날 창재라는 친구와 육영학교에 입학했다. 집에서 학교까지 5리가 좀 넘는 거리를 창재와 매일 둘이서 걸어 다녔다. 가타가나와 천자문을 미리 다 배워서 그런지 수업은 아주 쉬웠다. 책도 새것이어서 기분이 좋았다. 산마루에 올라서면 학교가 내려다 보였다. 활짝 핀 진달래꽃 살구꽃도 보였고 운동장에서 노는 애들도 보였다.  칼을 갈아서 가지고 다니면서 누가 소나무를 더 잘 자르나 경쟁도 하고 누가 먼저 꼭대기에 올라가나 내기도 했는데 중간쯤 올라가면 숨이 턱까지 차곤 했다.

      

 쌀쌀한 초겨울이 되면 등하굣길의 얕은 논에 얼음이 얼었다. 창재가 들어가자 짜장짜장 금 가는 소리가 나면서 발밑이 들어갔다 나왔다 했다. 재미있어 보여서 따라 들어간 순간 얼음이 깨지는 바람에 둘 다 핫바지를 입은 채로 빠졌다. 나와서 겨우 학교까지 가니 애들이 난로를 비켜 주었다. 겨울방학 때는 얼음판에 가서 썰매도 타고 눈사람도 만들었다. 방학은 한 달 정도였는데 그림 그리기나 글씨 쓰기 같은 숙제가 많았다. 하나도 안 빼먹고 다 해 갔다. 긴 겨울이 가고 따뜻한 봄이 오니 애들이 많이 와서 식구가 늘었다. 청련사란 절로 봄소풍도 갔다. 육영학교는 내가 집을 벗어나 최초로 맞이한 새로운 세상이었다. 안 선생님의 환대와 좋은 친구들 덕분에 나는 그곳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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