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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Nov 22. 2021

한 달에 한 번, 작심삼일

얼마 전 지인에게 2022년 달력을 선물 받았다. 벌써 한 해가 끝나가고,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는 시기이다. 그 말은 즉, 새로운 다이어리를 준비할 시기라는 뜻이기도 하다.

유명 커피 브랜드들은 변함없이 다이어리 증정 프리퀀시를 시작했고 온라인 문구 쇼핑몰들도 2022년 다이어리 기획전을 열기 시작했다. 이제는 디지털 시대라 사용할 수 있는 디지털 아이템이 많아지면서 종이 다이어리의 인기는 줄어들었지만 나는 아직 아날로그를 지향하는 편이다. 종이에 색색깔의 펜들로 사각사각 적는 그 맛을 어찌 포기하랴.


그런 나를 보고 아직도 그런 걸 쓰냐고 묻는 이들도 간혹 있지만, 나는 아직도 이런 걸 쓰는 사람이다. 물론 1년 내내 부지런히 쓰진 못한다. 거의 앞부분만 열심히 쓰고 뒷부분은 새것이나 다름없다. 그래도 표지와 속지까지 꼼꼼히 살펴 하나를 고른다. 


그리고 제일 앞 장엔 새로운 한 해 동안 내가 이루고 싶은 목표를 적는다. 10개는 족히 넘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그 목표가 매해 비슷하다는 것.  결국 이루는 것보다 남는 게 더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매년 똑같은 내용을 목표로 정하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책 100권 읽기, 주 1회 30분 운동하기. 이 2가지가 그것이다.

책 100권 읽기는 최근 몇 년간 성적이 좋지 않다. 작년 같은 경우는 넘버링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몇 권을 읽었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할 정도다.

주 1회 30분 운동은... 아무 말하지 않겠다. 그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나머지 목표의 예로는 자격증 취득이나, 특정 분야 공부하기 정도인데 최근 몇 년간 그 자리는 아이의 성장과 우리 가족의 가계와 관련된 것들로 대체되었다.  매 해 비슷한 내용이 있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전혀 다른 내용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각각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세부사항을 작성한다. 목표만 적어 놓는 것보다, 그것을 이루기 위한 활동 계획을 구체적으로 정하 하면 목표를 이루는데 훨씬 도움이 된다. 그리고 다이어리 제일 앞장에 색색깔로 어여쁘게 작성하면 다이어리를 펼칠 때마다 보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나를 채찍질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그렇다 나는 이렇게나 빠삭한 이론으로  열심히, 훌륭하게 리스트를 작성한다. 그런데 왜 매년 못 이룬 목표가 더 많을까? 정답은 내가 제일 잘 알고있다.  그것은 바로 실행력의 문제.


아무리 예쁘게 작성 한 들 그것은 종이일 뿐이다. 나의 결과가 아니다. 결과는 나의 행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매일 1시간 독서.라고 예쁘게 썼다면 매일 1시간 실제로 독서를 해야 나는 목표를 이루게 되는 것인데 이놈의 실행력 부족 때문에 늘 목표가 결과가 아닌 그저 예쁘게 적은 목표로 남게 되는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고선 더 심해졌다. 이제 책상에 앉아 다이어리 펼쳐볼 시간과 정신적 여유가 없다. 그러니 그저 연말에 연례행사처럼 다이어리 꾸미기작성만 할 뿐 다시 읽어볼 기회조차 없으니 그 목표는 내 기억 속에서도 존재하지 않더라. 몇 개월이 지나서야 '아 맞다. 나 다이어리 있었지?' 하며 펼쳐보면 예쁘게 작성된 한 페이지만 있을 뿐 뒤쪽은 그저 깨끗한 종이다.


그래서 작년부턴 좀 달라지고 싶어 다이어리를 눈에 잘 띄는 곳에 두고 매일 펼쳐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매일 할 수 있는 것 위주로 목표를 정했다. 예를 들면, 매일 일기 쓰기 같은 것들이다. 그랬더니 정말 옛 어르신들의 말씀 그대로 정확히 3일. 딱 3일 하더라. 주로 일요일 밤에 정신을 차리고 목표를 쓰고,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3일 동안 열심히 하고 목요일엔 지쳐서 3일간의 피로로 지쳐 쓰러져 못하는 거다. 잠들기 전엔 죄책감에 눈에 다이어리가 보여도 외면하게 된다. 그러다 월말이 되면 다시 또 각성하고 다이어리를 꺼낸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작성을 시작한다.


그렇게 한 달에 한 번씩, 목표 쓰고 3일 실행하고 흐지부지 되어버리는 패턴이다. 세상에나 정말 작심삼일이란 말은 정말이지 무슨 주문 같은 걸까? 어쩜 이렇게나 정확할까 싶어 매달 놀라는 중이다. 가끔은 스스로가 너무 한심해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그러다 지난번 짐 정리를 하며 몇 년간의 다이어리를 발견했다. 정리 못하는 사람들이 늘 그렇듯 정리하다 말고 주저앉아 다이어리들을 꺼내 읽었다. 그러다 작년 다이어리를 읽다 깜짝 놀랐다.


세상에 그래도 매달 3일씩이라도 했더니 내가 뭘 좀 했더란 거다. 운동도 한 달에 3번은 했고, 일기도 한 달에 3번은 썼고, 영어 공부도 한 달에 3번은 했더라.


가랑비에 옷 젖듯. 한 달의 3일들도 나에게 젖어들었다.


거의 새것처럼 깨끗한 지난 몇 년간의 다이어리보다 작년의 것은 손때가 묻어있었다. 아마도 매달의 3일 치만큼일 테지.  그 한 달의 3일들이 나를 참 뿌듯하게 만들었다. 그 3일만큼은 참 열심히 살았더라. 그래서인지 그 간의 일기들을 읽다 보니 내가 조금은 변했구나 싶었다. 애 하나에 종종거리며 아무것도 못하고 있던 나였었는데, 조금은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간 것 같았다. 고작 3일이지만 그날의 일기속의 나는 호랑이 기운이 솟은 것 마냥  이것저것 즐겁게 해냈고 그 덕분에  책도 읽고, 운동도 하고, 공부도 조금 했다. 무엇보다 즐거워 보이는 내가 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내가 정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스스로 움직인 내가 그곳에 있었다.


목표를 모두 이루진 못했지만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은 애쓴 내가 보인다.


예전의 나였다면 아마 못 이룬 목표들을 보며 스스로 한심하다 핀잔을 주고 있을 텐데 이번엔 좀 달랐다. 이만큼이라도 애썼다 싶었다. '잘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결과보다 과정이 주는 즐거움과 뿌듯함을 느꼈다. 잊고 있었던 그 마음을 다이어리 속 내가 알려주었다. 덕분에 올해는 조금은 기쁘게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이어리를 쓴 덕분에, 그것도 고작 한 달에 3일씩 작성한 덕분에 이런 기쁜 마음을 얻었다.


그래서 내년 다이어리에 적을 첫 번째 목표는 한 달에 한 번 작심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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