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배운 문화중 나의 정신 상태를 긍정적이고 건강하게 유지시키는데 막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반주'이다.
반주 : 밥을 먹을 때 함께 마시는 술.
(라고 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 기록되어 있다.)
나의 아버지는 반주를 즐겨하셨다. 어릴 땐 왜 밥을 먹으며 술을 마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내가 반주를 알게 되면서 아버지의 그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름) 오랜 직장생활 동안 반주가 없었다면 어떻게 해낼 수 있었을까. 나의 육아생활에 반주가 없었다면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하루 일과가 모두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허기와 안도감.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저녁을 먹으면 아무리 맛있는 찌개, 국, 반찬과 먹어도 밥알이 쑥 내려간 기분이 들지 않을 때가 있다. 소화가 안돼서 꽉 막힌 기분이 아니라 목과 위장의 사이 어딘가에 미처 다 내려가지 못한 조금의 음식물이 자리하고 있는 기분이랄까? 물을 마셔도 식후에 커피를 마셔도 해결되지 않는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 그 기분이 소주 한 잔 혹은 맥주 한 잔 이면 쑥 내려가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다른 수분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그 기분이 술이라는 것에는 한 잔에 해결이 된다. 그러니 밥 한술에 술 한잔, 밥 한술에 술 한잔 하다 보면 그날의 허기도 채워지고 긴장감은 사라지도 안도감아 차 오르며 피로가 풀린다. 또한, 밥이랑 같이 먹으니 취하지는 않고 배는 부르다. 그렇게 기분 좋은 상태가 된다.
물론 기분이 너무 좋아져서 반주로 끝나지 않고 본격적인 술자리로 넘어가기도 한다. 그래서 좋은 기분이 더 좋아지고 더 좋아져서 기껏 풀린 피로가 다시 축적되기도 하지만, 이것을 어찌 반주 탓을 하겠는가? 이건 그저 흥을 주체 못 한 내 탓이다.
그러니 비겁하게 술 탓은 하지 않겠다.
아무튼, 그 피로감까지 풀린 그 기분이 좋아 반주를 하게 된다. 특히 일이 많아 야근을 한 날이나, 회사에 스트레스를 받은 날, 큰 프로젝트가 종료된 날 직장 동료와 함께하는 반주는 더없이 맛있다. 그리고 그런 날들은 같이 먹은 음식의 맛이 술의 향이 그리고 그날의 기억이 쉽게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기꺼이 나와 함께 반주에 동참해 준 그날의 사람들.
추운날 얼어붙은 몸을 녹이기 위해 마셨던 어묵탕과 주먹밥과 소주 한 잔.
벚꽃 떨어지던 봄날 가게 밖에 준비된 테이블에서 꽃을 보며 밥 위에 멸치무침 올려 먹으며 마셨던 소주 한 잔. 더운 여름 치킨과 함께 마신 생맥주. 가을비 내리던 날 파전과 함께 마신 막걸리까지 생생하게 기억난다.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아이를 재우고 어질러진 집을 치우고 씻고 늦은 저녁과 함께 마신 맥주 한 캔.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기억되는 그 많은 날들의 내 기분은 오류가 있는 듯하다. 하나같이 즐거운 날들로 기억이 된다. 분명 회사일로 기분이 상했던 적도 있을 것이고, 날씨의 감성으로 센치하고 우울했던 날들도 있을 터인데 왜 인지 그날들을 기억하면 미소가 지어지고 즐거운 마음이 든다. 함께했던 사람들의 웃는 표정만 떠오른다. 고작 반주로 한두 잔 (?) 마신 술에 취해 기억이 왜곡되었을까. 하지만 나만 이런 건 아닌 걸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함께했던 사람들과 그날의 이야기를 해보면 모두 웃으며 그날의 이야기를 한다. 즐거웠다고. 모든 추억은 미화되는 게 진실인 걸까?
밥상에 술 한잔이 올랐더니 그날이 추억으로 남았다. 그들과 함께한 많은 식사자리가 있었지만 유독 술을 함께한 날은 진하게 남는다. 그게 술이 가진 힘일까? 아니면, 술을 찾게 한 그날의 내 감정의 차이일까.
뭐가 맞는지는 몰라도 나에겐 반주가 주는 추억이라 새겨졌다.
작정하고 마시는 술 약속보다 '밥 한 끼 하자' 하고 만난 자리에서 곁들여지는 술 한 잔이 더 좋다. 술만 마시는 것보다 식사를 하며 이야기하는 자리가 더 좋다. 취하기 위해 마시는 것보다 배부르기 위해 먹다 마시는 한잔이 더 좋다.
그래서 아마도 난 이 반주의 문화를 오래오래 애정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