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누가 운전해서 내려왔노?"
"이번에는 나랑 언니랑 번갈아 가면서 했지."
"느그 언니가 고속도로 운전을 했다고? 안 봐도 뻔하다. 니가 더 많이 하고 내려왔겠지."
"아니다, 아빠. 진짜로 언니랑 나랑 반반 운전해서 왔다."
운전면허증이 3년 만에 빛을 발한 김에 아이 방학 기간에 맞춰서 동생과 함께 친정집에 내려갔던 날, 도착하자마자 아빠와 동생이 나눈 대화다. 당신의 첫째 딸이 옆에 있다는 것을 잊으셨는지, 몇 번을 이야기해도 믿을 마음이 없으신 듯 보였다. 내가 운전면허학원을 등록했을 때도, 필기시험에 이어 실기 시험에 합격했을 때도, 주행시험까지 합격해서 면허증을 받았을 때도 한결같은 반응을 보이셨던 아빠였기 때문에 놀랍지는 않았지만, 솔직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이 서운한 마음은 나름의 유구한 역사가 있었으니... 지금부터 그것들을 기록으로 남겨보려고 한다. 일종의 증거 자료다.
아빠는 운전 이야기만 나오면 딱 편을 나눈다. 동생은 운전을 잘하는 아빠를 닮아서 처음부터 주차까지 완벽했지만, 나는 장롱면허인 엄마를 닮아서 면허증을 따놓고도 운전은 하지도 않았고 이제야 시작한 운전 실력도 완벽과는 거리가 멀다는 식이었다. 그래서 동생이 아빠 차를 빌려서 어딜 다녀오겠다고 하면 선뜻 차 키를 내어 주시면서도, 내가 아이와 둘이서 같이 갈 곳이 있으니 차를 빌려달라고 하면 딱 그때 아빠도 차를 써야 할 일이 있다고 하셨다. 와... 다시 되뇌어보니... 우리 아빠 진짜 너무 치사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동생만 친정집에 내려갔을 때였는데, 양 옆으로 차들이 주차되어 있었고 이삿짐센터 트럭도 있었던 상황에서 동생이 차를 빼려다가 가까이에 있었던 외제차를 살짝 긁었다고 했다. 그곳은 주차장이 아님에도 평소에도 사람들이 주차장처럼 사용하던 길이었어서 사고가 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이긴 했다. 다행히 다친 사람도 없었고 긁힌 부분도 작아서 비용도 많이 나오진 않을 거라고 했다. "그만하길 정말 다행이다."라고 말하며 통화를 마무리 지으려고 했는데, 동생이 "근데..."라며 말을 이었다. 뭔가 다른 일이 있었던 건가 싶어 핸드폰을 더 바짝 귀에 갖다 대고 들은 말은 "아빠가 내가 외제차 긁은 거 언니한테는 말하지 말라더라. 아빠 진짜 웃기지 않나."였다.
속이 빤히 읽히는 우리 김 씨 아저씨. 첫째 딸이 자기 차를 가지고 나갔다가 혹시라도 사고를 낼까 봐 매번 안 빌려줬던 건데, 믿고 빌려준 작은 딸이 사고를 냈으니... 이걸 첫째 딸이 알았다가는 입장이 난처해지기 딱이다 싶으셨던 거다. 환갑 넘으신지도 한참인 어른이신데... 면이 서질 않겠다 싶으셨던 거다. 동생과의 전화를 끊고 득달같이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서 "아빠... 그런 일이 있었다면서요...?" 할 수도 있었지만, 우리 김 씨 아저씨의 자존감은 지켜주어야겠다 싶어서 동생과의 통화 후에 핸드폰은 살포시 옆으로 밀어두었다.
그리고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일이 있고 난 이후에 아빠가 운전 이야기를 할 때 첫째 딸을 이전처럼 깎아내리진 않으시는 듯하다. 그래서 아빠의 태도가 유지된다는 조건 하에, 일단은 나도 계속 모르는 척을 하고 있으려고 한다. 그 사이에 나 혼자 4시간 넘게 운전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운전 실력이 더 늘었으니 이제는 내가 아빠 차 키를 그냥 가지고 나가도 아무 말하지 않으실지도 모를 일이다. 말 나온 김에 다음번에 바로 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