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미움받을 용기보다 더 큰 용기
내가 오래 참을 수 있었던 건 다 남편을 많이 이해한 덕분이었다.
남편도 정말 누구보다도 힘들었을 거라고. 공부하느라 돈은 많이 썼고, 장학금을 받아서 책임감은 크고, 근데 아내는 힘들어하고, 평생 애써온 공부를 그만두기는 곤란하고, 학위를 빨리 끝내야 아내 고생도 끝날 것 같아 더 몰두했더니 공부는 뜻대로 안 풀리고, 아내는 병이 들어 헤어지기를 원하고.
이야기를 듣던 상담사님이 이상하다는 듯 물으셨다.
“그런데 모두 다 뒤로 미뤄놓고 하시면, 그건 뭘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거죠?”
나도 똑같이 했던 생각이었다.
“남편이 신학을 공부했어요. 저는 교회에 가면 사모님 소리를 들었구요. 웃기죠? 남편은 공부를 잘했어요. 교회 사람들은 사모님인 제가 고생하는 걸 대단하다고 하면서도 그걸 기본값으로 생각하고 제 고생을 늘 응원했고요. 나중에는 지친 와중에 주변 모두가 제 고생을 당연하게 여긴 것도 힘들었어요. 교회에 가선 남편 직장이라 긴장하고, 집에서는 혼자 애들 보느라 고단하고, 그래서 이런 부분에 대해 남편에게 위로받고 싶었는데.”
상담사님의 측은하다는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뭔가 촉이 왔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상담사님께 물었다.
“선생님, 교회 다니세요?”
상담사님이 조금 민망해하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이제 더 편하게 말할 수 있었다. 나는 남편과 좋은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고, 좋은 아내가 되고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고. 사람들이 다들 남편이 훌륭하다고, 좋은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했고, 남편이 갑자기 신대원에 간다고 했을 때도 반갑지는 않았지만 응원했다고, 그런데 졸업식 때 상복을 입고 가고 싶더라고 말이다. 돌아보니 나는 그때 이미 최대치로 힘들었던 것 같다고.
거기에서 5년 가까이 흐른 거예요,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는 채로요.
안쓰럽다는 얼굴로 나를 보는 상담사님 덕분에 말을 계속 이어갔다.
“어느 순간부터 남편의 교회에 제 자리가 없고, 남편의 하나님 나라에도 제 자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언젠가 남편에게도 이 얘기를 했었는데 남편은 계속 지금 하는 학위만 끝내고, 그러면 시간을 낼 수 있다고 말했어요. 자기더러 다 때려치우라는 거냐고 하면, 저는 남편 앞길 막는 사람이 될 수 없어 참고, 학생이라 어쩔 수 없다는 말에 또 참고 살았어요. 근데 외국에서 보니 유학생 가족이라도 저처럼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더라구요. 같은 절망 패턴을 반복하고 못난 사람이 되어가다 알았어요, 아, 가스라이팅이 이런 거구나. 현타가 너무 크게 와서 얼마나 힘들었나 몰라요. 결국 남편이 변했지만 다 싫어졌어요."
그러다 수술을 두 차례 하고, 내 병 때문에 공부 망쳤다고 할까 싶어 시댁에는 아무것도 알리지 못한 채 실밥 풀고 며칠 만에 귀국한 것, 밝게 지내지 못한 탓에 어머님과 사건이 있었던 것, 이사를 나온 것, 나 때문에 텐션 떨어졌다는 남편이 봄부터 한 달을 누워 지내는 걸 보고 이제는 남편을 이해하면서도 더 버틸 수는 없게 된 것까지도.
"이혼할 용기는 나지 않고, 살고도 싶지 않고, 그러니까 지나간 제 인생이 너무 부질없는 거예요. 학바라지 끝낸 사람이라도 되면 삶이 덜 부질없을까, 그런 생각도 했었는데, 이젠 그것도 필요 없어요."
고생 너무 많으셨다는 상담사님의 말에 눈물이 날 것 같아 참으려니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말이 튀어나왔다.
선생님, 저는 썅썅바 여자예요.
사람들이 사모님이라고 부르던 여자였는데, 살고 싶어서 썅썅바 여자가 될 용기를 냈어요. 사람들이 저를 소돔 여자라고 하든, 남편 인생 말아먹은 여자라고 하든, 애들을 한부모가정에서 자라게 한 여자라고 하든, 그냥 욕 다 먹고 죄책감도 안고 가기로 했어요. 그렇게라도 해서 숨 조금 덜 갑갑하게 쉬면서 살고 싶어요."
“아유...... 그렇게까지 생각 마세요. 이렇게 하실 수도 있는 거죠. 그런 가정에서도 이런 갈등이, 이런 일들이 사실 많아요, 아무래도 잘 드러내지를 않아서 그렇지.”
아직도 오롯이 기억에 남아 나를 위로하는 따뜻한 말. 괜스레 죄송해서, 그리고 결혼 생활이 하루도 빠짐없이 불행하기만 했던 건 아니어서, 좋은 순간들도 많았고 아이들을 보며 함께 즐거웠던 순간들도 간간히 있었다고 말했다. 외국 생활이 주는 긴장이야 늘 있었지만 나는 친화력이 있어 생활도 잘 하고 친구도 잘 사귀었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끝내 이혼이 필요했다. 내가 행복한 순간에 남편은 부재했고, 내가 불행했던 순간은 늘 그의 부재가 원인이었다. 나는 잘 웃는 사람이었는데, 남편과 있는 자리에서는 크게 웃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농담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남편과 있는 자리에서는 농담을 하지 않게 되었다. 남편의 존재가 내 불행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선생님, 저는 이제 원래의 저로 돌아가고 싶어요. 이제 그만 그 사람의 아내이고 싶어요. 얼마나 나쁘고 발칙한 여자가 되든, 결혼을 유지하면서 껍데기만 남은 채로 사는 것보단, 사라지는 것보단 낫잖아요.”
눈물을 삼키며 이야기를 마친 후 나는 남편에게 상담 차례를 넘기고 밖에서 기다렸다.
바랐던 일인데, 내 결정 때문에 남편이 평생 매진한 것을 이제 못 하게 될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너무 괴로웠다. 아이들에게도 미안했다. 마음을 달래고자 친구에게 전화했다. 상간소에서 승소하고 위자료 4천만원 판결을 받은 친구였다.
“얘, 너는 진상 씨가 소장 받고 본가로 들어가서 반쯤 빈털터리 될 때 마음이 어땠어? 나 지금 마음이 너무 안 좋아. 남편한테도 너무 미안해. 불필요한 죄책감이라는 건 아는데, 그래도 마음이 너무 많이 무거워. 그래서 너는 어땠나 하고.”
대략 십 년의 결혼 생활 중 남편이 고작 일 년 가량을 제외한 세월 내내 외도한 증거를 발견했던 친구가 말했다.
“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지. 근데 시간 지나면 괜찮아져. 가스라이팅이 그렇게 지독해. 야, 나는 진상이가 걔랑 바람피운 거 알고서 어땠는지 알아? ‘아, 얘가 그렇게 오래 바람을 피우면서 나한테 거짓말할 때마다 얼마나 괴롭고 불편했을까?’ 그렇게 생각했어."
웃으면 안 되는데 웃음이 났다. 너무 어이가 없으니 오히려 위로가 되었다. 꿈도 야무진 그런 생각을 했던 친구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고 하니, 나도 쓸데없는 죄책감에서 해방될 날을, 지금은 묘연한 그날을 언젠가는 꼭 맞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