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다시 만나고, 마침내 헤어지고
기일이 왔다. 남남이 되기 전 가족간 증여로 자동차 명의를 바꾸느라 잠시 봤었지만 법원에서 다시 만나니 심장이 무섭게 두근거렸다. 법원 방문이 벌써 세 번째여도 판사를 만나기는 태어나 처음이었다. 물어물어 찾아간 그곳은 복도 입구에서부터 공기가 이상했다. 기다리는 공간은 조용했고, 쌍쌍이 앉은 사람들은 서먹했다. 적당한 자리에 남편과 나란히 앉았다. 몇 번이라고 우리를 부르면 이동해 달라고 했다. 얼마만큼 기다려야 하는지 모른 채 앉아 남편에게 알렸다.
"내가 조만간 칼퇴가 어려워질 수도 있어요."
남편은 아이들이 보호자 없이 집에 한 시간 넘게 혼자 있는 건 안 좋은 것 같다고, 혹시 그렇게 되면 자기에게 말해달라고 했다. 고맙다고, 아직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나도 여보가 돌봐 주면 애들이 제일 좋아할 것 같다고 했다. 내가 하도 히스테리를 부려서 그런지, 힘든 엄마랑 지내느라 아이들이 너무 시달려서 그런지 아빠가 오는 걸 아주 많이 반가워한다고도 알렸다. 그러자 남편도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나랑 있을 때, 애들이 너무 밝아요. 지나치게 밝아요.
마음이 아팠다. 이혼 의사를 또렷이 밝히고 대차게 거절당한 내가 퇴근 후 저녁 먹고 들어가 누워 있는 동안 남편은 아이들을 정성껏 돌봤다. 그전에도 둘째 픽업과 짧은 저녁 돌봄은 아빠 담당이었으니, 아이들이 놀 때 어떤 표정인지, 어떤 패턴인지 이제는 남편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남편이 요즘 자기와 있을 때 공주와 왕자가 지나치게 밝은 것 같다고 했다. 엄마는 마음이 미어졌다.
"여보가 보기에도 그래요? 나 때문인 거 같애. 내가 당장 괜찮아질 수는 없으니까 아무래도. 나 때문에 애들 짜부러지고 있으니까 여보가 잘 놀아주세요. 잘 놀아주겠지만."
"그럴 수도 있는데,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해요. 우리집에 와서 놀 때도 원래 놀던 것보다 이상할 만큼 밝아요."
그동안 어색하느라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아직 부부인 동안 한꺼번에 다 나누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오래간만에 우리는 차분히 아이들 얘기를 했다. 요즘 공주는 이런 식으로 지내고 있고, 왕자는 저런 식으로 지내고 있다고 알렸다. 친정 엄마가 와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얘기하니 그도 아이들이 할머니 할아버지와 이렇게 저렇게 놀았다고 말했다. 아이들도 나름의 대처 방식을 스스로 찾아가는 것 같았다.
앞으로도 응급 상황이 생기면 언제든 자기한테 마음 편히 연락 달라는 어째서인지 갑자기 든든한 그와 얘기를 한참 나누다 고개를 잠시 돌려 보니 조용한 몇 호실에 앉은 예닐곱 쌍의 곧 남이 될 부부들 중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것은 우리 둘 뿐. 다들 어색한 침묵 속에서 판사 앞에 불려갈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불현듯 의무 상담 절차를 마무리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내 차례는 끝났으니 나가서 남편을 불러달라는 상담사님께 그런 부탁을 했었다. 이래저래 남편이 나보다 훨씬 더 많이 힘들 거라고, 나처럼 어디 가서 털어놓지도 않고 혼자 묵묵히 삼키는 스타일이니 상담사님이 마음을 잘 위로해 주시고 얘기도 잘 들어 주시면 좋겠다고. 남편의 개별 상담도 끝나고 상담사님 앞에 다시 나란히 앉았을 때, 아이들이 조부모님과 있는 동안 상대 배우자의 험담을 듣지 않을 수 있도록 주의해 달라는 마지막 당부를 마친 상담사님이 말씀하셨다.
두 분의 이혼에서 저는 특별한 점을 봤어요.
두 분 모두, 같이 사는 동안 '나도 힘들지만 상대가 더 힘들었겠다'는 생각을 많이 가지고 계세요. 두 분은 본인들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고, 그걸 자연스러운 걸로 여기시구요. 그런데 법원에 와서 이혼 접수하시는 분들이 대부분 그렇게 생각을 못 하세요. 두 분이 서로를 지원해 주고 응원해 주는 부분들, 그게 그렇게 흔하지 않은 거거든요."
순간 나는 알았다. 내가 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그도 상담사님께 같은 말을 했었구나. 기어코 이혼을 해야겠어서, 살아야겠어서, 그동안 나 참 힘들었다며 내가 밖에서 그를 나쁜 놈 만드는 동안, 숨통을 조이는 불필요한 죄책감을 떨쳐내려 친구와 전화하는 동안, 그는 상담사님께 아내가 많이 힘들 거라는 얘기를 했었구나.
참을 새도 없이 눈이 뜨거워져 얼른 고개를 숙였더니 입고 있던 청바지 위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바로 옆에 앉은 남편에게 눈물을 들키지 않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서로에 대한 흔하지 않은 그 마음 갖고 아이들도 잘 지원해 달라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서로에게 시간을 주는 3개월이 되기 바란다고, 필요하면 아동 심리 상담 기관을 이용해 보라고 안내를 듣는 내내 나는 떨군 고개를 들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상담이 끝나고 나와서 벌게졌을 눈으로 또다시 그와 어색하게 헤어져야 했으니까.
대기석에서 한 칸 띄우지도 않고 나란히 앉은 채 지금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 맞는지, 옆의 이 사람과 내가 이제 정말 남이 되는 게 맞는지 스스로 묻게 될 만큼 아무 일 없는 듯 아이들 얘기를 나누고 있으니 우리 부부의 번호가 불렸다. 일어나 걸음을 떼는 이 순간이 사과에 적합한 때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갑자기 절박해졌고, 남편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다시 또 미안하다고 말했다. 이혼 얘기를 꺼낸 후 언제나 미안했지만 특히 더 미안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이제 그만하라고 그가 나의 말을 잘라먹은 게 하나도 아프지 않을 만큼.
쭈뼛대며 들어가 판사님을 마주보며 남편과 나란히 앉았고, 간단한 질문 몇 개에 대답하고 나니 십여 년의 결혼 생활은 끝나 있었다. 인터넷에서 봤던 이혼 후기 그대로였다. 이제 판결문을 들고 관할기관에 가서 3개월 안에만 신고하면 이혼에 효력이 생긴단다. 남편이 또 만날 것 없이 지금 바로 가자고 했다.
나는 이동해서 신고만 하면 다 끝날 줄 알았다. 한두 달이라도 더 기다렸다가 판결문을 제출할지 고민하게 될 줄도, 그렇게 가방에 넣으려던 서류를 바로 제출하게 될 사건이 일어날 줄도 그때는 전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