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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비 Nov 05. 2023

(구)어머님의 고구마

그 고구마를 (구)며느리가 먹습니다

언니 생일 축하하느라 남매들 모여 점심을 거하게 먹고 돌아오는 늦은 오후. 이제 곧 아빠를 만난다고 설레하며 차에 탄 아이들은 이내 고개를 카시트에 기대어 고이 잠들었고, 도로변의 나무들은 참 곱게도 물들었고, 스피커에서는 좋은 노래가 나오고, 행복이 차 안을 가득 채울 듯 모처럼 감사한 마음까지 들었다.


결혼한 사람, 결혼을 하려는 사람, 결혼을 했다가 만 사람. 다양한 우리가 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서로를 위하는 마음 가득 담아 담소를 나누며 나는 가족이 있어 참 다행이라고, 참 좋다고 생각했다. 입 밖으로 그런 얘기를 꺼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아마 그 자리의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서로의 존재가 참 소중하다고.


좋은 친구들이 분명 있지만, 어려서 한집살이 하며 갖은 사정을 공유하며 살아온 가족에 비할 수는 없다. 적어도 우리집은 그렇다. 한껏 지지고 볶으며 차를 태워 나갔지만 돌아오는 길 곤히 잠든 얼굴을 보며 우리 아이들도 오래도록 서로를 위하고 아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건 남매들 함께한 식사 시간이 너무 좋았어서다.


그러니 아이들이 아빠와 사이좋게 잘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 역시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아빠가 자기 역할을 잘하면 좋겠다, 나도 더 잘하자 다짐할 때쯤 (구)남편이 온다는 긴장 탓인지 배가 아팠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소화제를 먹고 누워 있으려니 애들 아빠가 와서 아이들과 인사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가 할아버지랑 고구마를 캤다는 말에 공주는 자기도 캐려고 했었는데 왜 혼자 캐고 왔느냐 볼멘소리를 했다. 닌텐도를 챙기고 어쩌고, 비가 올 것 같네 어쩌네 하며 시끌벅적하더니 애들 아빠의 목소리가 갑자기 내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어머니가 고구마 캔 거 좀 챙겨 주셨어요, 여기 두고 갈게요.

"그래요, 고마워요. 어머님한테 감사하다고 잘 먹겠다고 전해 주세요."


알겠어요, 이제 갑니다 하는 그의 대답, 엄마한테 인사하라는 얘기, 다녀오겠다는 아이들의 밝은 목소리를 끝으로 집은 다시 조용해졌다. 마음이 조금 먹먹해졌다. 모임에서 만난 사람 중 하나가 어머님이 칼을 던졌을 때 왜 경찰을 부르지 않았냐고 물었었다. 나는 그게 그럴 일인 줄 몰랐다고 대답했었고.


그때는 일어난 일들 하나하나가 돌덩이처럼 마음을 짓눌렀지만 이제는 다 지난 일이고, 심지어는 남의 일 같기도 하다. 이혼을 해도 나를 여전히 아이들의 엄마로, 식구처럼 생각할 거라는 어머님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러니 아이들과 먹으라고 김치를 보내 주시고 이렇게 고구마도 보내 주시는 걸 테지.


후숙도 안 된 고구마를 씻고 찌는 동안 모카포트로 커피를 만들었다. 아이들이 할머니 할아버지랑 좋은 시간을 보내고 오면 좋겠다. 아빠랑도 좋은 시간을 보내고 오면 좋겠다. 엄마한테는 하지 않는 얘기도 아빠랑 많이 나누고 돌아오면 좋겠다. 잔소리 폭격에 짜부라진 마음이 잘 쉬고 오면 좋겠다.




오랜만에 돌아온 <도비와 함께 노래를>


포르테 디 콰트로, <단 한 사람>


이 일의 발단은 아래 브런치북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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