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가의 고독 Ep 06
니하오.
오랜만에 중식으로 돌아왔다. 아니, 처음으로 중식이다. 미식의 활동이 뜸했던 이유 중 절반은 요 근래 입맛이 집을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나의 점심시간은 그저 귀차니즘과 고독만이 존재했다. 기나긴 늦장마처럼 끼니를 대충 때울만한 최대한 가까운 곳만 찾는 매너리즘에 젖어있다가, 간만에 무시할 수 없는 맛집을 발견해 발걸음 했다.
보건소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근처 식당을 검색하니 나온 곳. 그렇게 우연히 포털사이트에 뜬 곳은 알고 보니 ‘광주 3대 볶음밥 맛집’이었다. 짜장 맛집도 짬뽕 맛집도 탕수육 맛집도 아닌, 볶음밥 맛집이라니… 그 희한한 명성에 구미가 당겼다.
구청을 왼쪽에 끼고 오래된 골목을 걷다 보니 제법 포스를 내뿜는 가게가 드러난다. 낡은 간판과 빛바랜 천막 지붕에서 세월이 느껴진다. 하필 맞은편에 주차된 차는 멀리서 보고 레몬색 택시 인가 해서 이국적일 지경이었는데, 본넷 위에 돗자리를 깔아 두신 거였다. 이거 흥미진진해지는 구만…
오후 2시를 조금 넘긴 시간. 혹시나 북적댈까 싶어 일부러 늦게 찾았다. 들어서니 하필 사장님과 종업원 분들이 한창 식사 중이셨다. 아뿔싸 민폐야. 다행히 주방장님은 입가를 닦으며 마무리 단계에 접어드신 상태였다.
“볶음밥 하나요.”
마치 볶음밥만 100번 먹으러 와본 전력이 있는 단골마냥 주문을 했다. 뒤늦게 메뉴판을 찾아본다. 참 겸손하시다. 시그니처 메뉴를 전혀 강조하지 않은 담담하고 얌전한 메뉴판. 리뷰에서 극찬하던 볶음밥을 주문했으나, 사실 그게 새우볶음밥인지, 해물볶음밥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단백질 성분은 사실 중요하지 않다. 볶음밥은 밥이 두루 잘 볶아지고, 재료가 잘 익어있고, 간만 맞으면 평타인 메뉴 아닌가?
4인 테이블 4개, 신발 벗고 들어가는 룸엔 4인 상 2개. 도합 24명 수용이 가능한, 작다면 작은 가게다. 장밋빛 벽지와 옥색 몰드와 문틀에 가슴이 설렌다. 이 가게의 모든 흔적들이 맛집임에 틀림없다고 신호를 보내는 것만 같았다.
“음식 나왔습니다.”
할머니뻘 사장님이 쟁반째 전해주는 오늘의 메뉴. 짬뽕국물이 아닌, 계란국의 등장에서 묘한 실망과 기대가 동시에 스친다. 짜장은 딱 봐도 패스다. 원래 짜장밥을 좋아하지 않는다. 볶음밥에 짜장을 비비는 것은 더더욱. 나는 카레라이스면 충분하다. 하이라이스도 안녕하지 못하다.
볶음밥의 비주얼은 이토록 평범할 줄이야. 마치 사람들이 다 매력 있고 재밌고 착하고 좋은 친구라고 하는, “걔가? 걔가 그렇게 재밌어?”라고 되물을 법한 그 ‘걔’ 같다.
한입 가득 입에 넣어본다. 음… 맛있네. 그렇지만 눈이 커지고 웃음이 나오는 맛은 아니다. 볶음밥은 원래 맛있지 뭐.
계란국을 떠본다. 음… 닭 육수를 썼군. 치킨스톡을 넣은 걸까? 나는 그냥 달걀, 파만 넣은 깔끔한 맛을 좋아하는데. (구시렁)
깍두기도, 단무지도 평범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짜장을 좀 묻혀 먹었는데 역시나 내 취향은 아니다. 짜장이 맛없어서가 아니다.
볶음밥만 다시 먹어본다. 음… 맛있네.
버퍼링 아니다. 정말로 볶음밥만 계속 먹는데, 계속 맛있다. 계속 맛있다는 말이 나온다. 입에 넣고 씹고 굴리고 삼킬 때마다 맛있다.
뭐지, 이 밥…?
일단, 밥 사이사이 계란이 잘 풀어져있다. 보통은 스크램블처럼 계란이 뭉쳐있거나, 계란의 촉촉함이 남아 묻어 밥의 고슬고슬함을 방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집은 계란이 아주 얇게 포진되어있다. 집에서 쓰는 화력이나, 내가 계란을 넣는 타이밍으로는 절대 이런 계란 습자지가 나올 수 없다.
밥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친구는 이미 밥솥에서 나올 때부터 ‘난 놈’이다. 기름에 한 알 한 알 코팅되었지만 느끼함은 증발하고, 기름 고유의 고소함만 남았다. 파와 당근은 아주 잘 익었고, 아마도 짜장에 넣을 때 쓰는 깍둑썰기 된 돼지고기는 향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 퍼석한 식감과 곱씹을 때 조금 배어 나오는 육즙의 고소함만이 밥과 잘 어우러진다. 새우나 오징어, 홍합이 들어가지 않아서 천만다행인 것이다. 그들이 섞였으면 절대 이 담백함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해산물이 가진 바닷냄새는 밥과 기름만으로 완성된 고소함의 미학을 방해하고도 남았을 테니까!!
양은 어찌나 많은지, 결국 4숟가락 정도는 남겼다. 그래도 입맛 없던 요즘 날들에 비하면 이 정도면 선빵이다. 내가 다 먹을 때쯤 배달일을 하시는 듯한 카고 조끼를 입은 아저씨 둘이 들어오신다.
“볶음밥 둘이요.”
그렇다. 자타공인 볶음밥 맛집. 고독한 미식가도 인정할 수밖에 없던 볶음밥 맛집.
광주광역시 동구 서석동에 위치한 #삼미관 이다.
(일요일 휴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