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홍차를 찾아서
필수품도 아닌 기호품을 찾아 헤매 다니는 ~ 이런 글이나 쓰는 나의 잉여를 사랑해. 나의 근심이란 이런 사소한 것. 식후에 밥값보다 더 비싼 디저트의 맛에 기대와 실망으로 화를 내는 것.(김영민의 글 참조)
차, 커피, 위스키, 맥주 등 기호식품에 엄청난 시간과 돈을 쓴다. 기호식품이 부르는 게 값인지라 가격과 품질이 과연 일치하는지는 모르겠고. 홍차가 마시고 싶다. 내가 아는 홍차 중 간편하지만(티백) 만족스러운 품질을 선사하는 TWG를 판매하는 투썸플레이스로 갔다. 전에 받은 커피+케이크 쿠폰을 이용하면 내가 실제로 낼 돈은 그리 크지 않을 것 같아 간 것. 그런데... 음..... 상품준비 중이라는 안내문(안 팔았다).
그리하여 하루 종일, twg티를 구할 궁리를 하다 집에 가는 길에 버스에서 내려 다른 투썸플레이스에 갔다. 프렌치 얼그레이, 블랙티, 잉글리시블랙퍼스트 사이에서 망설였다. 3만 7천 원, 15개 들음. 핸드폰 계산기를 열고 두들겨보았다. 1개에 2천5백 원 정도. 아.... 비싸다..... 엄청난 사치다. 내가 가진 쿠폰은 2만 2천 원 상당의 것이었고 차액을 카드로 계산했다.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이 구절을 읽고, 마들렌을 먹어보았으나 내게는 그다지 감동을 주지 못했고, 오히려 나는 홍차를 찾게 되었다.
"과자 부스러기가 섞여 있는 한 모금의 차가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소스라쳤다. 나의 몸 안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깨닫고, 뭐라 형용키 어려운 감미로운 쾌감이, 외따로, 어디에서인지 모르게 솟아나 나를 휩쓸었다. 그 쾌감은 사랑의 작용과 같은 투로, 귀중한 정수를 채우고, 그 즉시 나로 하여금 삶의 무상을 아랑곳하지 않게 하고, 삶의 재앙을 무해한 것으로 여기게 하고, 삶의 짧음을 착각으로 느끼게 하였다."
"어머니는 하인을 시켜 프티트 마들렌이라는 작고 통통한 과자를 가져오게 했는데, 그 과자는 생자크라는 조개의 가느다란 홈이 팬 조가비 속에 넣어 구운 것 같았다. 이윽고, 침울했던 그날 하루와 내일도 서글플 것이라는 예측으로 심란에 있던 나는 기계적으로 마들렌 한 조각이 녹아들고 있던 차를 한 숟가락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부스러기가 섞인 그 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내 몸 안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콩브레에서 내 잠자리의 비극과 무대 외에 다른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지도 오랜 어느 겨울날, 집에 돌아온 내가 추워하는 걸 본 어머니께서는 평소 내 습관과는 달리 홍차를 마시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셨다. 처음에는 싫다고 했지만 왠지 마음이 바뀌었다. "어머니는 사람을 시켜 생자크라는 조가비 모양의 가느다란 홈이 팬 틀에 넣어 마든 '프티트 마들렌'이라는 짧고 통통한 과자를 사 오게 하셨다. 침울했던 하루와 서글픈 내일에 대한 전망으로 마음이 울적해진 나는 마들렌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을 기계적으로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감미로운 기쁨이 나를 사로잡으며 고립시켰다. 이 기쁨은 마치 사랑이 그러하듯 귀중한 본질로 나를 채우면서 삶의 변전에 무관심하게 만들었고, 삶의 재난을 무해한 것으로, 그 짧음을 착각으로 여기게 했다. 아니, 그 본질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이 초라하고 우연적이고 죽어야만 하는 존재라고 느끼지 않게 되었다. 도대체 이 강렬한 기쁨은 어디서 온 것일까? 나는 그 기쁨이 홍차와 과자 맛과 관련이 있으면서도 그 맛을 훨씬 넘어섰으므로 맛과는 같은 성질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 86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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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넌 숲 속을 걷고 있고 땅에는 나뭇잎이 깔려 있어.
한참 비가 내리다 그쳐서 공기는 아주 축축하지.
넌 그곳을 걸어. 왠지 이 차에는 그 모든 게 담긴 것 같아." -영화 애프터 양 중에서.
차의 맛은 결국 뭘까? 인생의 맛. 인간의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아름다운 기억의 총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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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 기억을 엿보며 생각이 많아진 어느 날, 제이크는 가루차를 물에 타서 마셔본다. 이 영화를 감독했을 뿐 아니라 각본까지 쓴 ‘코고나다’는 어떻게 가루차와 잎차의 비유를 들어 인간과 안드로이드, 복제인간의 얘기를 할 생각을 했을까. 가루차와 잎차가 대체 뭐기에? 가루차를 물에 타거나 잎차를 물에 우리면 똑같이 ‘마시는 차’가 되는 거 아닌가? 완전 ‘NO’ 다.
잎을 일절 손상하지 않고 고이고이 형태를 살려 만든 ‘홀리프(whole leaf)’ 찻잎이 최고 하이퀄리티 찻잎이다. 찻잎을 잘게 잘게 짜각짜각 자를수록 등급이 낮아진다. 홀리프 찻잎을 조금 더 잘라서 부서진 찻잎을 ‘브로큰(broken)’이라 하는데 이 ‘브로큰’이 두 번째 등급이다. 조금 더더더 잘라서 더더더 부서진 찻잎은 ‘패닝(fan nings)’이라 하고 이게 세 번째 등급이다. 가장 낮은 등급은 가루 형태 찻잎인 ‘더스트(dust)’다. ‘홀리프’와 ‘브로큰’ 까지는 잎차로 팔리고 ‘패닝’과 ‘더스트’ 등급 찻잎은 보통 티백으로 만들어진다. 가게를 찾아온 손님이 찾았던 가루차는 아마 ‘더스트’였을 테고, 제이크가 판다는 잎차는 분명 ‘홀리프’였을 터다.
[Column : 김소연 기자의 ‘영화로 보는 茶 이야기’ ⑰ 애프터 양] 잎차는 하이퀄리티·가루차는 로퀄리티? 김소연, 매경LUXMEN매경럭스맨. 2023-10 (157):22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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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차라리 소소한 근심을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 이를테면 ‘왜 만화 연재가 늦어지는 거지’, ‘왜 디저트가 맛이 없는 거지’라고 근심하기를 바란다. 내가 이런 근심을 누린다는 것은, 이 근심을 압도할 큰 근심이 없다는 것이며, 따라서 나는 이 작은 근심들을 통해서 내가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김영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중에서
크리스마스 즈음, 크리스마스 케익 사전주문을 받는 투썸플레이스. 커피맛은 그닥이지만 케이크는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