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고 온화한 어른의 교복
가을을 마중하는 마음으로 새 꼬까옷을 하나 샀습니다. 누구로부터도 잘 어울린다는 소리를 듣는 색이라 우쭐한 기분으로 고른 빨간색 울 니트입니다. 쇼룸에서 처음 입어 봤을 때, 맨살에 닿는 촉감이 무척 부드럽고 결이 고와서 한눈에 반해버렸습니다. 작년 겨울에 어울리지 않는 니트, 보풀이 심한 니트, 너무 두껍고 무거운 니트들을 정리하고 난 뒤 텅텅 빈 옷장을 보며 생각했답니다. 쌀쌀한 날씨가 다시 돌아오면 마음에 드는 따뜻한 니트를 한 벌 구비하자, 하고요.
뜨개질하는 할머니가 떠오르는 퐁실퐁실한 니트, 꽈배기 모양으로 짜인 케이블 니트, 땡땡이나 줄무늬 패턴이 화려한 니트도 좋지만, 역시 담백하고 온화한 어른의 옷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특별한 무늬도 짜임도 없는 단색의 니트가 떠오릅니다. 너무 두껍지도 무겁지도 않아 맨몸에도 셔츠 위에도 두루두루 입을 수 있는 그런 니트 말입니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지금 같은 계절에는 딱 한 벌만 입어도 따사로워 기분이 좋습니다. 니트를 고를 때는 맨살에 입어도 부드러운 것을 고릅니다. 그래서 울 100%나 캐시미어 같은 결이 고운 원단이 조금 값비싸더라도 마음이 갑니다. 입었을 때 몸에 햇살을 살포시 두른 듯한 느낌이 들면 합격입니다.
늦가을이 다가오는 요즘, 하나둘씩 니트를 입은 사람들에 눈길이 갑니다. 오늘도 한남동의 힙한 성지, 앤트러사이트 카페에 갔더니 서로 다른 색의 니트를 입은 사람들이 제각기 커피를 마시고 있더군요. 그 풍경이 무척이나 고즈넉하면서도 발랄해 보였습니다. 하늘색 니트, 핫핑크색 니트, 연두색 니트, 노란색 니트……. 가을의 니트라고 하면 단정하고 정숙한 느낌이 드는 무채색도 좋지만 역시 쨍하고 다채로운 색의 니트에 더 눈길이 가는 건 왜일까요? 나뭇잎들도 울긋불긋 옷을 갈아입듯 사람들도 울긋불긋한 모습으로 거리에 녹아듭니다. 모두가 옷장 속 서랍을 열고 옷을 주섬주섬 꺼내 입으며 가을의 풍경을 더욱 알록달록 아름답게 물들이는 데 일조하는 이 생활의 단상이 꽤 사랑스럽습니다.
가만 보면 니트란 꽤 기특한 옷입니다. 커피와도 잘 어울리고 도서관과도 잘 어울리고 연필과도 잘 어울리고 안경과도 잘 어울리는, 이른바 여유롭고 지적인 풍경을 만들어냅니다. 니트 한 벌만 제대로 갖춰 입어도 웬만한 셔츠를 입은 모습보다 성숙하고 온화한 분위기가 납니다. 그러한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어른스러운, 동시에 어른이 부드럽고 생기를 갖추게 되는 옷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셔츠보다 편안하지만 적당히 격식을 갖출 수 있다는 점에서는 어른의 교복 같다고도 할까요. 좋아하는 친구와 동료가 니트를 입은 모습들을 왠지 증명사진처럼 차곡차곡 수집해 두고 싶은 기분이 듭니다.
참, 니트를 입는 즐거움에는 양말 고르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바로 니트의 색과 깔맞춤한 양말을 신고 거리를 나서는 것인데요. 저는 빨간 니트를 샀으니 빨간 양말을 신곤 합니다. 그런 작고 귀여운 위트가 하루의 기분을 바꿔 주기도 합니다. 어느 날, 빨간 양말을 신고 회사 앞 편의점으로 두유를 사러 갔는데 점장 아저씨가 제 두 발을 가리키며 외치는 것입니다. “오, 빨간 양말~ 멋있는데!” 저의 기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기분도요. 하루에도 몇 번씩 제 두 발을 내려다볼 때마다 흐뭇해집니다.
본래 니트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니트를 입으려 할 땐 항상 소심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씨가 쌀쌀해지면 어김없이 너그러운 마음이 되어 이런 생각을 하고 맙니다. 옷장 속에 좋아하는 니트 하나쯤은 갖추고 싶다고요. 아침에 집을 나설 때마다 니트의 색과 맞춘 양말을 신고, 지적이게 보이는 안경을 더할 줄 아는 위트도 슬쩍 갖추고 말입니다.
다람쥐가 도토리를 비축해두듯, 옷장 속에 좋아하는 니트 하나쯤 갖춰 봅시다. 서랍 속에 ‘꽤 마음에 드는걸……’ 하고 느껴지는 니트가 있다는 사실 하나로 마음이 겨우내 오래 든든한 법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