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로크의 '인식론'을 통해 본 '나빌레라' 속 심덕출 할아버지
어떤 나무로 만든 배가 존재하는데 항해 중 한 부분이 파손되어 새로운 나무로 교체되었습니다. 항해를 계속하며 이러한 교체되는 부분이 많아지고, 결국 원래 배를 이루던 나무는 남지 않고 교체된 나무만 남게 된다면, 이 배는 이전과 같은 배인가요? 아니면 다른 배인가요?
질문을 바꿔서 배가 아닌 인간을 이야기해 본다면 어떨까요? 인간의 세포는 1초에 380만 개가 교체되며 80일이 지나면 인체 전체가 완전히 새로운 세포로 교체된다 하는데요. 눈에 보이지 않는 세포는 차치하고서라도 인간은 아기 때와 유년기, 청소년기를 거쳐 성인이 되고 늙어가면서 외형 또한 눈에 띄게 변해가죠. 이렇게 성장하고 나이 든 사람은 과거 아이였을 때와 같은 인격체라 할 수 있나요?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시간이 흘러도 우리를 동일한 인격체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의식, 즉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나이가 들어 외형이 변하여도 자신에 대한 인식이 같다면 같은 인격체라는 거죠. 즉 인격의 동일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심리적 연속성이라 주장했습니다. 동일한 개인이지만 아기였을 때를 기억할 수 없다면 동일한 인격체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로크의 인식론에서 자기 인식의 자리에 꿈을 대입하여 ‘나빌레라’의 주인공 심덕출 할아버지를 살펴보면 어떨까요?
덕출은 로크의 인식론을 통해 보았을 때 심리적 연속성을 잃어가고 있는 치매 노인입니다.
기억을 점차 잃어가며 결국에는 자신에 대한 인식 조차 잃게 되겠죠. 과거의 자신과 같은 인격체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덕출의 존재를 증명할 하나의 장치가 있습니다. 바로 꿈이죠. 덕출은 치매 노인이지만 이어지는 기억, 꿈을 갖고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어렸을 때 우연히 보았던 무용수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아 발레라는 꿈을 가슴에 계속 품고 살아왔죠. 6.25 전쟁을 겪고 공무원으로 일하며 가정을 꾸리고 자식들을 키워오면서 가슴 한편에 미뤄 두었지만 발레라는 꿈을 계속 간직해 오며, 친구의 죽음을 통해 인생의 마지막에 꿈에 도전할 용기를 얻은 인물입니다. 젊은 무용수 채록을 만나 발레를 배우며 꿈을 이뤄가죠.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덕출은 치매와 싸웁니다. 계속해서 메모를 남기고, 채록의 도움을 받죠.
작품에서 덕출과 채록은 서로의 흔들리는 꿈을 지켜주는 공생 관계입니다. 치매로 인해 흔들리는 덕출의 꿈을 채록이 지켜주고, 상처로 인해 흔들리는 채록의 꿈을 덕출이 지켜주죠. 덕출은 채록을 통해 꿈을 이뤄가고, 채록은 덕출을 통해 꿈을 찾아갑니다. 꿈을 자기 인식으로 본다면 서로의 정체성을 지켜주고, 찾아가며, 완성하게 해 준 것이죠.
이 작품의 제목인 나빌레라는 ‘나비와 같다’라는 말입니다. 작품 안에서는 덕출이 채록을 가리켜 날아오를 아이라고 하지만, 저는 덕출이야 말로 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나비와 같은 인물이라 생각됩니다. 애벌레에서 번데기로, 다시 번데기에서 나비로 두 번의 변태를 통해 극적인 외형의 변화를 갖지만, 같은 존재인 나비처럼, 덕출은 나이가 들며 외형이 변해가도 발레라는 꿈을 잊지 않으며, 성체가 된 나비가 꽃과 꽃 사이를 날아다니며 화분을 옮겨 새로운 꽃이 피게 하듯 가족과 채록의 꿈을 지켜주고 새로운 꿈을 꾸게 해주는 인물이 바로 덕출이니깐요.
여러분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줄 자신만의 꿈을 갖고 계신가요? 대단한 것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정체성을 잃지 않게 해 줄 꿈들이 모두 가슴속에 돋아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