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아빠, 성형외과
"여기요. 여기요.
여기 의사 없어요!!
애가 경끼까지 했다니깐, 왜 아무도 안 오는 거야??
열경끼같아요.
열이 40도까지 올라갔다고요.
우리 애 잘못되면 어떻케.
김선생. 맞지??
소아과. OO소아과 펠로우 2년차."
작년 7월에 아주 성황리에 종영한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2에서 보면 한 아이 엄마가 신발도 못 신고 응급실로 들어와 다급한 목소리로 의사를 찾으며 울부짖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이가 40도가 넘는 고열로 열경련을 하는 모습을 보고 거의 반쯤 이성을 잃은 모습을 보이지만 응급실 의료진들의 친절하고 따뜻한 설명으로 보호자를 진정시키는 모습이 나오는데요. 그렇게 한바탕 소동이 있은 후 보호자는 응급실 의사의 학교 후배이고 현재 OO병원 소아과 펠로우 2년차 라는 대화 내용이 나오죠.
아마 제작진들은 아무리 소아과 의사라 할지라도 자신의 아이가 아프거나 다급한 상황이 오면 아이를 키우는 다른 엄마들처럼 불안과 다급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작년에 비슷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둘째가 아들인지라.
평상시 퇴근해서 집에 오면 유독 아들과는 몸으로 놀아줍니다. 공놀이부터 격하게 부딪히고 뒹굴고 하면서 땀 빼고 힘 빼면서 노는 게 제가 아들과 놀아주는 방법입니다.
워낙 장난 많고 말썽쟁이라 얼굴에 땀범벅이 되도록 신나게 놀아주면 잠자리에 눕자마자 곤히 잠이 드는데, 하루 종일 수술 때문에 녹초가 된 몸이지만 이렇게 아들과 놀아주면서 저도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근데, 그날따라 아들도 피곤한 상태에서 저랑 너무 심하게 놀았던 탓에 그만 창가 틀에 얼굴이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아이가 심하게 울기에 가까이 가서 보니 왼쪽 눈가의 피부가 찢어져서 하얗게 벌어졌고 상처에서 서서히 빨간 피가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순간 저도 열경련에 이성을 잃고 두려움에 떨었던 아이 엄마처럼 너무 놀라 즐겁게 놀아주던 그 마음은 온데 간데 없이..
"아. 아. 아!!"
정신 나간 사람처럼 아이를 꼭 끌어안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이의 얼굴에 생긴 으깨어지고 찢어진 상처를 보면서 제 마음도 그렇게 찢어지는듯했고 내가 좀 더 주의하고 신경 썼으면 이런 사고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수건을 가지고 흐르는 피를 닦고 상처를 누르면서 지혈을 했지만..
나의 부주의와 죄책감, 아이 얼굴의 상처까지 온갖 생각이 섞이면서 마치 정신 나간 야수처럼 그렇게 소리만 지르고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 엄마가 어떤 마음에 그렇게 미친 듯이 소리 질렀는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저도 그 순간 같은 마음이였을테니까요.
제가 레지던트 때 들었던 일화 중에는..
중환자실에서 회진을 돌던 다른 진료과 교수님이 갑자기 자신의 환자 혈압과 심박수가 떨어지면서 위험한 상황이 되자..
너무 다급한 나머지
"의사 불러!!"
라고 얘기했다는 말을 들으면서 저는 마음속으로
나는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외과의사잖아.
저렇게 위급한 상황에서는 이렇게, 이렇게 해야지.
역시 의사는 말이야.
모름지기.. 수술도 할 수 있고 사람의 생명을 다룰 수 있는 외과의사를 해야 하는 거야.
그 당시 저는 이런 근거 없는 자신감과 외과의사라는 멋에 취해있었습니다.
근데, 어쩌면 그 당시 세상 모든 환자를 치료할 수 있고 어떤 수술도 할 수 있다는 저만의 환상이 없었으면 그 힘든 외과 레지던트 생활을 못 버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소아과 펠로우 아이 엄마와 그 교수님의 상황이 이해가 됩니다.
자신의 아이가 다치거나 소중한 환자가 생사를 오가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누구나 그런 마음과 두려움을 느꼈을겁니다.
의사가 모든 환자를 치료하고 낫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정신과 등 여러 진료과목이 있는 것이겠죠.
하지만 만약 위험한 순간에 도와줄 의료 인력이 없는 상황이라면 진료 과목은 상관없습니다.
학생 때부터 그동안 배워왔던 의학지식을 총동원하여 어떻게든 환자를 살려내야 합니다.
소아과 펠로우 아이의 엄마는 어땠을까요??
시청자가 되어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보면서 그런 장면이 나왔을 때 그냥 남일처럼 웃어넘기고 말았지만 저도 제 아이의 얼굴이 찢어지는 상황을 겪다 보니 드라마 속 그 아이 엄마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전적으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내 아이에 대한 걱정
40도가 넘는 고열로 아이에게 회복되지 못할 장애가 남지 않을까?
이러다가 돌이키지 못한 후유증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아이를 잘 알고 아이의 병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소아과 선생님이었기에 신발도 못 신고 맨발로 정신 나간 사람처럼 외쳤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 의사 없어요!!"
저도 제 아이의 얼굴이 찢어졌을 때
우리 병원으로 데려가 내가 상처를 꼬맬까??
아니면 성형외과로 갈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어떤 결정이 내 아이에게 가장 좋은 선택이 될지를 수십 번을 고민했습니다.
낮 시간도 아닌 늦은 저녁이라 방문할 성형외과 병원도 없었기에 저의 고뇌는 더 깊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도 몇 번을 마음속으로
"어디 성형외과 의사 없어요!!"
이렇게 수십 번을 외쳤으니까요.
흐릿해지는 흉터처럼 그때의 그 기억을 잊어버린 듯 아들은 여전히 거칠게 놀고 있지만 눈가의 흉터를 보면 저는 아직도 그날의 걱정과 두려움, 후회, 자책감이 떠오릅니다.
저나 그 소아과 펠로우 선생님이나 의사이기전에 한 아이의 엄마, 아빠이기 때문에 내 아이를 위한 간절한 외침은 다른 부모들과 똑같습니다.
여기 의사 없어요!!
사진 출처 :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2 (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