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도망칠 수밖에

4학년 휴학, 교환학생

by 밍밍

나라는 사람을 분석할 때 큰 비중을 차지하는 특징이 양가감정이다. 뭐 거의 매사에 양가감정을 느끼고, 모든 것에서 동전의 양면을 찾아낸다고 보면 된다.


검사로, 유형으로 사람을 가두어 판단할 수는 없는 거지만... 자극 추구와 위험회피가 같이 높으면 항상 뭔가 하고 싶은 마음과 이제 좀 스트레스 없이 쉬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번쩍번쩍 솟구치는 것은 사실이다.


오늘의 파트는 20대 중반이고, 이때까지 경주마처럼 달려오던 내가 다시 판을 옮겨 마지못해 쉼표를 찍으며 '여유'라는 가치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된 이야기이다.


이 시기가 없었다면 다음 화에 이어지는 대학원 생활은 덜 힘들었을 수도 있지만 아직까지도 쉼 없이 벌리고 벌리고 벌리며 살았을 것 같다.


앞에서 이야기했듯, 어느새 4학년이 된 나는 대학 생활, 동아리 활동, 알바 및 과외, 봉사활동, 각종 문화생활(주로 영화제나 락페 자봉, 연극 리뷰어 활동....) 등을 하며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여전히 뭔가 목말랐다. 당장의 취업보다도 더 크고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어 근질거리던 참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고등학교 때 나갔던 민간외교단체를 통해 다시 미국 시골 community college 교환학생을 나가게 된다. 곱게 나갔어야 했는데... 가는 게 확정이 되고 온갖 사람들과 송별회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느라 마음이 말랑하던 참에 할머니와 단 둘이 대화를 하게 된다.


할머니는 또 남동생이 불쌍하다고 풀어놓기 시작하셨고 (당시 중학교 중퇴하고 히키코모리로 3년 정도 방에 틀어박혀 게임만 했었다) 내가 너무 쟤만 오냐오냐 다 받아주고 키워서 그렇지 않냐며 차별에 대한 썰을 풀게 되었다. 어쩐 일로 웃으시면서 뭐가 그렇게 차별이었는지 이야기해보라는, 재밌다며 또 없냐고 더더 말해보라는 할머니의 부추김에 하나, 둘 썰을 풀다가 나는 그만 선을 넘고 말았다.


"할머니가 나 딸이라고 지우랬었다면서요."


그러자 할머니는 아니라면서 마침 엄마가 들어오는 소리가 나서... 엄마가 들으면 속상하니까 우리끼리 비밀~이라며 눈까지 찡긋하셨다. 그렇게 하하호호 오래간만에 가족이랑 기분 좋게 이야기를 했네~ 생각하며 그날도 봉사단체 사람들을 만나러 갔던 거 같다. 갑자기 엄마한테 전화가 오더니 너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할머니가 울고불고 쓰러지고 난리가 났냐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황망하게 집으로 후다닥 들어가니 할머니가... 내가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배은망덕하게 자기 지우라고 하지 않았냐며 눈에 독기를 품고 삿대질을 해가며 죽일 듯이 대들었다며 노해 계셨다. 나는 졸지에 가해자가 되었고, 중학생 때부터 품고 있던 상처를 처음 꺼내놓았던 이 경험은 나에게 몇 배나 큰 상처로 돌아왔다. 할머니는 자기가 지우라고 한 게 아니라 엄마가 와서 딸인데 지울까요? 묻길래 지우지 말라고 했다고 엄마한테 떠넘겼고 엄마는 자기가 언제 그런 말을 했냐며 니가 잘못 듣고 지어낸 거라고 나한테 떠넘겼다. 그리고 미국에 나갈 때까지 내내 나는 죄인이었고, 할머니는 외할머니를 비롯해 친적들이 집에 올 때마다 저년이.. 거리며 나를 비난하셨다. 마음이 가장 지옥 같았던 부분은 내가 너무 오랫동안 혼자 아파했던 상처에 대해 사과는커녕 가해자의 포지션이 돌아오는 지점에 대한 절망감?


그렇게 만신창이가 된 마음으로 진짜 도망치듯 미국으로 떠났고 노트북도 차도 없던 20대의 동양인은 그곳에서 더 큰 세상은커녕 심심한 시골 라이프를 맞이하게 된다.


취업에 도움 되는 과목을 들으라는 엄마의 당부를 뒤로 하고(그래도 나도 성취가 중요한 사람이라 한 학기 연장해서 1년 반 있으며 졸업장을 따고 왔는데 그 졸업장은 평생 어디에도 써본 적이 없다 ㅎ) 졸업용 필수 과목 외에는 기타, 피아노, 연극, 심지어 사진 수업까지 들었다. 암실에서 흑백 필름 인화해본 경험, 지금 생각해도 소중하다...(+그땐 너무 무섭긴 했다) 예술을 향유하는 걸 좋아할 뿐, 창조엔 재능이 없음을 빠르고 확실히 알게 해 줘서. ㅎㅎ


도서관에서 근로 장학생처럼 일하면서(학생 비자로 할 수 있던 유일한 알바) 모은 돈으로 방학 때 유럽여행도 갔다 왔다. 그때가 원래 계획한 1년이 끝나서 (학점이 좋아서 계절학기와 추가 학점 수강신청을 허락받아서 한 학기만 더하면 졸업이 가능했던 건데 지금 돌이켜보면 왜 거기까지 가서 공부를 했는지... 바보다) 홈스테이 가정을 옮겨야 했어서 미국에 남아 있기는 눈치 보이는 상황이라 한국에 잠깐이라도 다녀오고 싶었는데 (친구들과 음식이 너무 그립고 향수병이 있긴 했다) 한국 비행기표가 유럽보다 더더더 비싸서 약간 아쉽게 가서 제대로 즐기지 못해 아쉽긴 하다. 그 유럽에서! 한국 음식과 한국을 그리워하다니ㅠ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데 그땐 그랬고 와중에 계절학기 듣느라 영국에서도 과제를.... 그래도 뭐 미국에서도 차 있는 일본 친구(같은 프로그램 교환학생)랑 친해서 같이 쇼핑도 다니고 (미국 시골은 정말 차 없으면 아무 데도 못 간다...) 물처럼 싼 와인도 열심히 마셨다. 미국 현지 친구들 파티에 어쩌다 초대받아 가면 화장실에 마리화나 있고 그래서 막상 미국 친구들과는 안 어울렸던 거 같다. 시골이 도시보다 순수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놀이문화가 없는 시골에서 무료함에 젖은 청년들이 무얼 하고 노는지 살펴본 결과 20대 청춘들은 도시로 보내는 것을 추천합니다. ㅎㅎ


뭐 어쨌건 좋은 경험이었다만 당시엔 한국에서보다 더 퇴보되는 느낌이 있어서 뭔가 하고 들어가야겠다 싶어 알아보다 미국 선댄스 영화제에 메일을 보내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영화도 실컷 보고 갔다. 워낙 인디영화를 좋아하기도 했는데, 그때 유타의 눈 덮인 길을 mp3 꽂고(bgm: 밸앤세바스챤 ㅎ) 걸어가던 나... 한국 사람 한 명도 없고 대부분 영화 관계자들이던 그곳에서 약간 위축되고 외롭던 느낌... 돈이 없어서 노숙자들이 장기 체류하는 1박에 12달러짜리 호스텔에서 사과 하나... 1달러짜리 티브이 디너 하나 먹으면서도 근무 시간 외에는 보고 싶은 영화를 마음껏 볼 수 있어 행복했던 이 시절이 아마 내 인생 가장 열정적인 순간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아, 지금 내 열정은 다 어디로 증발했을까??


퇴보라고 생각했던 이 시절이 크나큰 인정 욕구 뒤에 숨어있던 여유라는 이상향을 조금은 꺼내 주지 않았나 돌아본다. 이후의 삶은 내가 여태껏 살아남은 생존 방식인 열심이 노력이와 내 본성이가 필요로 하는 여유와 쉼(지금도 이런 개념을 생각하면 게으름, 귀찮음 같은 부정적인 개념들이 떠올라 열심히 떠올렸다) 같은 것들의 전쟁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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