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에야 나를 찾아 방황을 시작하다
20대 중반
돌이켜보면 재밌던 시절이었다.
처음으로 엠티도 가고, 술도 많이 마셨고, 동아리에서 공연도 했다. 공부보다는 나의 취향을 찾느라 바빴던 것 같다. 물론 알바로 나름의 경제적인 독립도 했고... 그로 인해 앞에서 겪은 어려움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졌다. 여전히 과외 갑자기 끊겨서 차비가 없고 밥을 못 먹고 한 나날은 있었어도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은 유년기보다 덜 절망스러웠던 것 같다.
그럼에도 대학 생활이 마냥 즐겁지 않았던 것은 학교 사람들이 어딘가 나와 다른 사람들 같았다.
딱 루시드폴 노래의 가사 중 '나를 둘러싼,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즐겁다.'는 느낌?
여유롭고 자존감 단단한 사람들 속에서 쭈굴대며 숨어있는 듯한 나날이었음에도 이곳에서 지식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했다.
그러나 결국 내가 마음을 붙인 곳은 학교가 아니라 한 봉사단체였다. 그곳 사람들은 따뜻했고 가족 같았다. 공부는 뒷전이고 봉사활동을 하고 뒤풀이를 하는 데 많은 나날을 보냈다. 이 상처 많은 사람들과 함께 서로를 보듬으며 큰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 그 와중에 계속 과외나 알바를 해야 했고 틈틈이 홍대 인디밴드를 보거나 대학로에서 후기 써주는 체험단 등으로 활동하며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았다. 어릴 적 책으로 나를 치유했다면, 20대엔 예술영화와 인디음악으로 인생을 배웠다.
나의 이러한 비 주류성을 높이 본(?) 운동권 선배들이 스무 살 새내기를 데리고 파업 시위에 데리고 갔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노조의 어려운 이야기는 공감이 갔는데 경찰차에 쫓기고 사람들이 쳐다보는 한심한 눈초리는 못 견디겠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동기들은 다 술 마시러 가는데 이상한 문선(?)을 나 혼자 배우러 가기도 싫었다. 결국 내가 선택한 외면이 뭔가 나에게 소외된 자들에 대한 부채감을 준건지... 아니면 나의 힘들었던 유년기에서 마음인지는 모르겠지만 봉사활동은 이런 나에게 하나의 위안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또한 처음엔 의미 있고 좋았는데 매너리즘에 빠질 즈음... 결국 남을 도와서 행복감을 느끼는 이 자체도 이기적인 마음이고 세상에 온전히 이타적인 건 없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 같다.
그렇다. 20대의 나는 다른 의미로 흑화 되고 있었다. 시니컬한 염세주의자? ㅎㅎ
나부터가 내 삶에서조차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조연으로 살아왔는데 주인공들이 가득한 대기실에 있는 느낌이었다. 뭔가 목표가 있을 땐 달리기가 쉬웠는데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는...
정말 열심히 살긴 했는데 방향이 없이 달리다 보니 무작정 불태우다가 번아웃이 오면 다 내려놓아 버리고를 반복했던, 감정 기복이 가장 크던 시절이었다. 이 시절 애꿎은 내 싸이월드는 화려한 미니룸과 신나는 음악/텅 빈 미니룸과 암울한 음악이 번갈아 걸리며 피폐한 나의 정신상태를 대변했다(요즘의 카톡 프사 역할? ㅎㅎ).
불면증이 계속되고 학교도 자퇴하고 싶던 즈음, 처음으로 학교 상담센터를 찾게 되었다.
우울 지수가 상당하다며 급으로 바로 대기 없이 상담을 받게 되었는데, 나는 자살 생각이 없는데 왜 자꾸 자살에 대한 염려성 발언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매우 안 좋은 상태였는데 스스로는 그 심각성을 못 느꼈던 것 같다.
이즈음 나는 가족과는 푼 것이 없었다. 귀갓길 집 앞에 엄마가 보이면 같이 엘리베이터 타기 불편해서 숨어있다 올라갔고, 할머니와 언니는 여전히 나를 괴롭혔고, 아빠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며, 남동생은 "아빠를 죽이고 싶다."는 둥 굉장히 격해있던 시절이었다. 집에서는 동생이 어느 날 집에 불을 지르는 건 아닐까 불안했고, 나의 모든 행동이 통제받는 것 같아 숨이 막혔다. 통금이 있었지만 싸워가며 집에서 잠만 겨우 자는 생활이었다.
학교에서는 수업에는 영 흥미가 없고 겨우겨우 F를 피하는 게 목표였던 것 같다. 한 마디로 완전히 길을 잃어버렸었다. 대인관계도 수월하지 않았는데 그때마다 가족이랑도 잘 못 지내는 내가 인간관계가 잘 될 리가 없다는... 이미 망했다는 마음이 올라왔다.
상담에서 뭘 했는지 기억은 별로 없다. 딱 하나 기억나는 것은... 선생님이 엄마, 원가족에게 큰 소리로 화를 내라고 시켰고 나는 끝까지 하지 못했다. 나는 이때까지 큰 소리로 화를 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이 점에서 내 남편은 자기가 내 병을 고친 은인이라고 생각함). 그저 내가 참는 게 익숙하고 편했고, 내 탓이라고 돌려버리는 것이 쉬웠다.
지금 돌아보면 성장하기 위한 성장통을 충실히 지나온 것이겠지만 여하튼 이때의 나는 조금 망가져 있었던 것 같다. 겉으로 볼 땐 배부른 명문대생의 고민으로 보이겠지만 자존감이 이보다 더 낮을 수 없어 명문대생이라는 것조차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밖에 느끼지 못하던....
스스로를 사랑하기 전까지는 사랑을 할 수 없다는 말도 맞는 것 같다. 아직까지 내 사전은 생존에 맞춰져 있지 사랑 같은 것은 사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