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영알못 중학생의 영어 접근기
마흔에 다시 영어 공부를 시작한 이야기를 적기 전에 영어와는 접점이 전혀 없던 70년대 끝자락에 태어난 제가 어떻게 영어와 친해지게 되었는지, 학창 시절 이야기를 먼저 풀어보려고 합니다.
초등학교 6학년 겨울 방학 전, 우리 반 반장은 틈이 날 때마다 정성스럽게 뭔가를 매일매일 쓰고 있었다. 도대체 뭐를 저렇게 정성을 다해 쓰는가 흘끗 봤다. 그녀가 쓰고 있던 것은 알파벳 필기체였다. 반장 유리는 영어 공책에 필기체를 정말 열과 성을 다해 집중해서 쓰고 있었다. 나는 물어보았다.
"이걸 왜 이렇게 열심히 써?"
"그냥. 해 두면 좋을 것 같아서."
그랬다. 나는 초등학교 때 영어를 배우지 않았다. 심지어 국민학교에 입학해서 중간에 초등학교로 변경이 되었고, '읍니다'에서 갑자기 '습니다'로 바뀐 맞춤법에 적응하느라 이리저리 변화의 바람에 바쁘던 세대였다. 토요일이면 학교에 갔고 매일매일 도시락을 싸서 가지고 다녔다. 다달학습과 이달학습이 서로 문제집 시장에서 경쟁을 했다. 달리 사교육이랄 것도 없어서 그나마 있던 것은 피아노와 태권도, 미술학원 정도가 주요하던 시절이었다. 그마저도 우리 집 형편에서는 태권도와 미술은 어려웠고, 음악을 좋아했던 엄마가 어떻게든 형편을 짜내서 보낸 피아노가 나와 동생이 받은 유일한 사교육이었다.
물론 영어를 아예 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학교에서 아침방송으로 가끔씩 인형들이 나와서 멍키멍키 하면서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르는 영상을 틀어주었으니 어쨌거나 영어를 접하긴 했던 것이다. 그것이 초등학교 시절 유일한 영어교육이었던 셈이다. 이와 비슷한 과정을 겪은 70 년대생은 아마 나 혼자는 아닐 것이다.
그렇게 영어에 대한 아무런 준비도 대책도 없는 상태로 나는 중학교에 갔다. 아주 마음 편하게. 다 같이 영어를 모르는 상태이니 약간의 걱정은 있었겠지만 어떻게든 되는 것 아닌가 하는 태평한 마음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A, B, C부터 배웠고 그 유명한 'I am a boy. You are a girl.' 이런 문장들로 영어를 시작했다.
하루는 교실에서 청소를 하고 있을 때였다. 청소를 마친 아이들이 갑자기 칠판에 영어 단어를 적기 시작했다. 단어를 외우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에게는 '단어를 외운다'는 개념조차 없었다. 초등학교 때는 위에서 적은 것처럼 다달학습이나 이달학습 중 하나를 골라서 문제집을 풀고 그것으로 시험공부를 끝냈는데 중학교에 오니 도대체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주변에 물어물어 보니 성문영어나 맨투맨 중 하나를 골라서 영어를 공부하면 된다고 했다. 중고 서점에 가서 성문기초영문법과 맨투맨 영문법 교재를 사서 보는데, 와, 정말이지. 너무 재미가 없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는 것은 둘째치고 영어는 정말 재미없는 과목이라는 것만 확실하게 알겠다. 그래서 나는 영어를 놓았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나름 반에서 5등 안에 들었다. 당시 반 평균 50명 그 이상 있던 시절이었으니까 혼자서 공부한 아이치고는 그럭저럭 했던 셈이다. 그렇다고 기초가 탄탄한 것은 아니었다. 혼자서 적당히 전과와 문제집을 참고로 한 아이가 하면 얼마나 했겠는가. 초등학교 시절에는 적당히 학교에서의 교육으로 잘 버틸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런데 학년이 점차 높아지고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점점 빈틈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학의 경우는 '공문수학'으로 조금씩 잡아가서 어느 정도까지는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영어는 정말 방법이 없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학원을 다니는 것도 아니었고 과외를 받는 것도 아니었다. 부모님은 굳이 학원을 가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지 않으셨고 사실 가정 형편도 그렇게 넉넉하지 않아서 나도 보내달라고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영어는 학교 공부가 전부였는데 예습복습이라는 개념도 내겐 존재하지 않았다. 집에 오면 적당히 책을 읽고 가끔 티비를 보면서 딩굴딩굴거리고 친구에게 편지를 쓰고 여전히 배우고 있는 피아노를 연습하고 그런 정도였다. (당시는 펜팔과 친구에게 손 편지가 상당히 인기를 끌던 그런 시절이기도 했다.)
영어는 답답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To 부정사 용법에서 진도를 나갈 수 없어서 앞의 6쪽만 너덜너덜했다. 관계대명사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현재완료라는 개념은 알겠지만 문제는 풀기 어려웠다. 이대로 나는 영포자가 되는 것인가 싶었다. (당시에는 영포자란 개념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랬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고 그 사이 기초를 쌓아 올리지 못한 채 이리저리 땜빵으로 얼기설기 세운 영어라는 과목은 내게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던 상태로 중학교 2학년이 거의 끝나갔다. 몇몇 아이들이 윤선생 파닉스를 하는 것을 보기는 했는데 별로 관심이 가진 않았다.
때마침 기회라면 기회일까, 눈높이 영어를 알게 되었다. 공문수학이 독자적으로 서기 시작하면서 눈높이수학으로 명칭을 바꿀 무렵, 눈높이 수학 선생님이 본사에서 영어교재도 론칭을 했다면서 알려주셨다. 그렇게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나는 눈높이 영어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테스트를 했고 나는 기초부터 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지금도 생생하게 생각나는 1 형식 문장, 주어와 동사로만 구성된 가장 쉬운 문장부터가 중학교에서 2년을 배운 당시 내 영어의 수준이었고 시작이었다. 지금 아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영어에 노출되는 것을 생각하면 14살에 시작한 영어공부는 당시로서도 상당히 늦은 편이었다.
눈높이 영어 교재는 기초단계인 만큼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주어와 동사로만 구성된 아주 간단한 문장들이었다.
I run. He runs. They run. Tom runs.
보통 앞 장에는 이런 문장들이 세 줄 써져 있었다. 뒷 장에는 한글 해석이 있었고. 그 겨울, 나는 그렇게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지금 수준으로 보면 초등학교 3학년 교과서에서 배우는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