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영어 이름 'Bill'은 '빌'이라고 쓰지만 사실 발음은 /비어/에 가까울까?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맥주를 뜻하는 단어 'beer'는 한국에서는 '비어'라고 하지만 실제 발음은 /비얼/에 가깝다. 왜 영어 단어와 한국어 발음이 서로 다를까 궁금해하다가 나는 제대로 영어 발음을 배우게 되었다.
제대로 영어 공부를 시작한 것은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였지만 그전에 영어 발음을 배우러 간 적이 있었다. 역시 중학교 2학년이었고 여름방학 기간이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교회에는 영어를 잘하시는 분들이 여러 분 계셨는데 그중 한 분께 사흘간 영어 발음에 대해서 배울 기회가 생겼다. 선생님은 출판사에서 번역 전문 출판사에서 일하고 계셨는데 점심시간에 30분 정도 시간을 내게 내어 주셨다.
첫날 선생님은 내게 사람의 입모양을 그려서 보여주시면서 영어와 한국어의 모음과 자음을 내는 방법이 다르다고 알려주셨다. 그렇게 /d/, /t/, /s/, /z/ 소리와 /p/, /b/, /h/, /k/ 소리와 같은 영어의 자음과 한국어의 모음과는 다른 영어의 모음 소리들을 정확한 혀의 위치까지 그려 보여 주시면서 시범을 보여주셨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음 /이/는 영어로는 단모음, 장모음 /i/와 다른 소리라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짧게 /i/ 모음을 낼 때는 /에/에 가깝게, 길게 /ie/소리를 낼 때는 입술을 옆으로 길게 늘리면서 힘을 주고 /이이/로 내는 것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익히는 과정이었다. 나는 익숙치 않은 혀와 입술 근육을 사용하면서 발음을 배웠다. 사흘간 하도 연습을 해서 경련이 날 정도였다.
내게 영어 발음을 가르쳐 주신 선생님은 알고 보니 굉장한 실력자로 나중에 하와이대학교 응용언어학과로 유학을 가셨다. 거기서도 현지인보다도 영어를 잘해서 지도교수가 감탄을 했고 졸업 후 하와이대 교수 요청도 받았지만 한국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생각에 귀국을 하셨다고 한다. 당시에는 그 사실을 모르고 그냥 엄마 손에 이끌려 가서 영어 발음을 배웠는데, 그 발음이 내 영어 인생의 방향을 바꾼 하나의 길이 되긴 했다.
나는 그 배운 발음을 기억해서 그대로 발음하려고 굉장히 애를 썼다. 문법도, 단어도 잘 몰랐지만 배운 단어만큼은 정확하게 발음하고 싶었다. 그렇게 겨울방학 때 그 기초적인 문장들을 수없이 읽으면서 공부를 했다. 'He runs.'라는 문장을 따라 쓰는 칸은 한 줄 뿐이었지만 'He runs.'라는 그 한 문장을 쓰는 동안 나는 /히이 뤄원즈/를 수없이 소리 내어 읽었다. 뒷장에는 한글 해석을 보고 영어 문장을 쓰는 영작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때도 역시 소리 내어 외우면서 썼다. 그렇게 하면 간단한 여섯 문장이지만 한참이 걸렸고 공부를 마치고 나면 입과 혀가 아팠다.
원래 눈높이 영어는 한 주에 20장씩만 진도를 나가게 되어 있었는데 나는 마음이 급했다. 이렇게 기초적인 문장부터 공부하는데 한 주에 20장으로는 언제 진도를 나갈 것인가. 곧 중 3이 되는 것이다. 이 속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당시 눈높이 영어 선생님은 내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좋게 보아주셨다. 하여 예외적으로 40장씩 진도를 나가도록 해 주셨는데 나중에 이 때문에 상부에서 경고를 받기도 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진도를 매주 많이 나가면 안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시면서 "걸리면 곤란하니까 이번 주는 30장만 하자. 다음에 다시 조금 더 가져다줄게."라고 아쉬워하는 나를 다독여주시기도 했다. 내 영어와 수학을 책임져 주신 그 중학교 2학년 때 눈높이 선생님 두 분께는 지금도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다.
그렇게 해서 약 두 달 정도 나는 수없이 문장을 읽고 외우면서 기초를 다져갔다. 그리고 그 전략은 유효했다. 쉬운 문장으로, 정확한 발음으로, 소리 내어 읽으면서, 수없이 반복하며, 외워가는 이 방법으로 영어를 천천히 몸에 새기듯 익혀갔다. 그렇게 해서 영어에 조금씩 익숙해져 갔고 아주 느리게 영어와 친해지기 시작했다. 발음을 배우는 일은 쉽지 않았고 사실 고통스러웠지만 그렇게 영어를 시작한 것은 돌이켜 보니 참 잘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