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발음을 익히고, 기초 문장으로 시작하면서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쉬운 영어독해집도 공부하기 시작했다. 자발적으로 구입했다기보다는 학교에서 아침자습용으로 다 같이 사서 공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리더스 뱅크였을 것이다. 다른 아이들이 하는 깜지는 학교 영어 선생님이 내주시면 했다. 단어장도 나는 딱히 만들지 않았고 어쩌다가 부록으로 얻은 단어장을 하나 들고 다니면서 외웠다. 우선순위 영단어 이런 책을 아이들이 들고 다니면서 공부하는 것은 봤으나 눈높이 영어 하나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에 따로 공부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여전히 영어 문법은 어려웠다. 역시 교회에서 영문학을 공부하신 한 분께 중3 겨울방학 때 영문법을 배웠다. 선생님은 교재로 성문기초영문법이 좋겠다고 하셨다. 그 겨울방학에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욱 훑어보았다. 선생님은 고려대 영어영문과를 졸업하신 분이셨는데 결혼하시면서 우리 집 근처로 이사 오셨다. 그러나 선생님의 차분하고 나긋나긋한 다정한 목소리의 설명을 듣고 있노라면 자꾸 잠이 왔다. 적당히 졸기도 했는데 아마 아셨겠지만 그냥 적당히 넘어가셨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 기초영문법 한 권을 끝까지 보기는 봤으나 여전히 문법은 어려웠다.
그리고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아이들은 영문법을 열심히 공부하는데, 나는 아무리 해도 안 되겠다. 문법책만 들여다보면 미칠 것 같았다. 기껏 친해지고 있는 영어가 견딜 수 없이 싫어졌다. 결국 나는 영어 문법을 공부하지 않기로 했다. 물론 학교 시험은 봐야 하니까 학교 선생님이 강조하시는 교과서 포인트는 공부를 했다. 여기서 공부하지 않기로 결정한 영문법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영문법이었다. 당시에는 최소한 대여섯 문제는 영문법 관련 문제였는데 진짜 많이 맞아야 두 문제 정도로 심한 경우는 거의 다 틀렸다. 어차피 해도 안 될 것 같으니까 나는 독해와 듣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영문법을 공부하다가는 이도저도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영문법은 학교에서 선생님이 교과서로 가르쳐주시는 것만 공부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의외로 내게 유리한 결과를 가져왔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모의고사 외국어 영역의 영문법 관련 문제가 2~3문제로 줄어들고 배점도 줄어든 것이다. 많아야 1.5점이었던가. 그래서 나는 영어의 절정기를 달리던 고3 때도 수능모의고사에서 영어 만점을 받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늘 문법에서 한 문제 이상 틀렸기 때문에 최고로 잘했을 때가 80점 만점에 79점이었다.
문법은 필요하다. 나도 기본적인 주어, 서술어, 목적어 등과 품사의 용법 정도는 알고 있다. 내가 싫었던 것은 어떤 동사 뒤에 to + 동사원형이 오는지 ing 형태로 오는지, 둘 다 가능한지를 구분하는 것 같은 정도 이상을 넘어서서 아주 세세하게 파고드는 부분들이었다. 우리나라 말을 할 때를 생각해 보면 된다. 문장 하나를 말할 때마다 하나하나 단어의 용법을 파고들면서 이 단어가 형용사적 용법으로 사용되었는지 같은 것을 생각하며 말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우리나라 문법도 제대로 못 배웠는데 영어문법을 왜 이렇게 파고들어야 하는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마도 마음으로 와닿지 않았기 때문에 영문법을 즐길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어찌 되었건 영어문법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다른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매달린 방법은 영어문장을 통으로 암기하는 것이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단어만 외워서는, 그리고 숙어만 외워서는 어떻게 사용되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냥 문장을 통째로 외워야 이 단어가, 이 숙어가 어디에 어떻게 들어가는지 알 수 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뿐이다. 짧은 문장은 쉬웠지만 이제는 문장이 길어졌다. 그런 경우는 끊어서 외웠다. 어디서 끊어야 할지 고민하면서 외우다 보니 자연스럽게 문장의 구조를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구와 절 단위 정도는 쉽게 구분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나는 구조적으로 들어갔던 전통적인 우리나라식 영어교육이 아닌 먼저 문장 체계를 몸에 익힌 다음 나누는 식으로 공부를 한 셈이었다. 아이들이 처음에 언어를 배울 때 엄마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이 들려주는 문장을 끊임없이 따라 하고 반복하면서 언어를 체화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하자 영어는 다시 재미있는, 즐거운 과목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