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 1등과 3등의 영어 단어 외우기 방법
이렇게 통으로 문장을 외웠지만 단어는 따로 외우긴 해야 했다. 하지만 문법과 마찬가지로 그냥 무작정 단어를 외우는 것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반 친구들이 우선순위 영단어나 나중에는 우선순위 영숙어 이런 책을 들고 다니면서 외우는 것을 보긴 했다. 호기심에 구경은 했는데 보는 순간 마음이 답답해졌다. 이렇게 단어를 외울 생각을 하니 또 영어가 싫어지게 생겼다. 그나마 문장을 통해서 단어를 외우는 것은 괜찮았지만, 문제는 내가 외우는 문장에는 그렇게 고급 어휘들이나 표현들이 종종 나오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때는 잘 몰랐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되어서야 그 이유를 제대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나는 주로 실용영어, 즉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표현 위주로 영어를 공부한 셈이다. 그러니 수능시험이나 학교 시험에서 나오는 단어들은 실용영어에서는 그다지 많이 나올 리가 당연히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단어를 외우긴 외워야 했다. 당시에는 그냥 좀 더 어려운 단어들이 필요하다고 여겼을 뿐이다.
하지만 영어단어장을 들고 다니면서 알파벳 순으로 그냥 외우는 것은 정말 적성에 맞지 않았다. 내가 암기를 못하는 사람인가 하면 그건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단편적으로 단어를 하나씩 외우는 것은 고문에 가깝게 느껴졌다. 어쩌다 들고 다니던 단어장의 순서가 abundant에서 넘어가지 못한 것을 보면 내가 얼마나 단어장과 안 친했는지 알 수 있다. 친하려고 계속 들고 다니면서 하교하는 버스 안에서도 보긴 보았는데 가까워질 수 없었다... 그 무렵이었는지 나중이었는지 하여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라는 책이 대히트를 쳤는데 그 책도 재미는 있었으나 적극적으로 활용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렇게 써 놓고 나니 나는 굉장히 까다로운 picky learner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 내가 단어를 외우는 방법은 조금 달랐다. 우선 독해 문제집을 푼다.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글로 접근하는 것은 괜찮았다. 읽으면서 나오는 모르는 단어는 일단 밑줄을 그어둔다. 독해문제집은 친절하게도 옆에 어려운 단어 및 표현에 대한 설명을 따로 박스에 넣어 준다. 밑줄을 그으면서 추측해 보고 그래도 모르겠으면 옆에 있는 상자 속에서 단어를 확인하면서 거기에 적혀 있는 뜻을 확인한다. 이해가 되었으면 다음 문제로 넘어간다. 여기서 끝났으면 그 효과는 좀 미미했을 것이다.
내가 독해 문제집을 푸는 방법은 조금 독특했다. 일단 지문을 읽고 문제를 풀었다. 그리고 물론 채점은 하는데 채점을 하면서 또 한 번 지문을 읽었다. 그러면 모르는 단어가 한 번 더 눈에 들어온다. 이 때도 모르면 형광펜으로 줄을 한 번 더 그었다. 그리고 일주일 치 진도가 끝난 다음에 그때까지 공부한 지문들을 주욱 훑어보는 것이다. 그렇게 서너 번을 봤는데도 여전히 밑줄 친 단어의 뜻이 낯설거나 바로 기억이 나지 않으면 그때는 손으로 적어 본다. 주로 세 번 정도를 적었다. 그래도 안 되면 두어 번 더. 그렇게 몇 번을 적으면서 역시 소리 내어 읽는다. 단어를 소리 내어 수십 번 읽으면서 그 뜻과 소리에 익숙해지도록 노력한다. 그리고 문제집을 끝까지 마치면 처음부터 끝까지 주욱 훑어보면서 모르는 단어를 다시 확인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어느 정도 단어를 외울 수 있었다.
내가 사용한 방식은 나중에 생각해 보니 단기 기억에서 장기 기억으로 자꾸 건드리는 방법이었다. 한 번 집중해서 보고 끝이 아니라 짧게 짧게 여러 번 기억 속에 넣어주고 꺼내는 방식을 반복했다. 거기에 지문이라는 상황 속에서 연결 지어서 기억하기 때문에 바로 생각은 나지 않아도 앞 뒤 관련된 단어들과 연결 지어서 의미를 떠올리면 조금 더 유추하기가 쉬웠다. 모르는 단어는 나중에도 또 생각이 바로 안 날 확률이 높다. 그렇게 다른 문제집을 풀 때도 계속 겹치기 때문에 반복적으로 보게 된다. 그렇게 한 번에 많은 수의 단어를 집중적으로 외우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오랫동안 몸에 익혀가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내 방법이 모든 사람에게 맞다고는 할 수 없다. 나는 사교육을 별달리 받지 않았기 때문에 혼자서 이리저리 실험해 보면서 나에게 적합한 공부법을 스스로 찾아갔다. 그렇게 해서 나와 제일 잘 맞고 거부감이 제일 적은 방법을 적용한 것뿐이다. 이것은 내가 나중에 다른 여러 가지 일을 시도할 때도 비슷하게 적용이 되는 방법이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는 조금씩 서서히, 그러나 길고 천천히 가면서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지면 나중에 집중해서 가속도를 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과 전교 1등이던 내 친구는 공부방법이 조금 달랐다고 한다. (나는 문과 전교 3등이었다- 중학교 때 전교 50등 안에도 들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정말 장족의 발전이다.) 내 친구는 아는 단어에는 밑줄을 그으면서 읽었다. 모르는 단어는 밑줄을 긋지 않았다. 뜻을 확인한 다음 다시 밑줄을 그으면서 읽는다. 이때 모르는 단어의 뜻이 기억나면 밑줄을 긋고 모르면 여전히 넘어간다. 그렇게 하고 나면 모르는 단어 부분만 하얗게 남아 있게 된다는 것이다. 하얀 부분이 없어질 때까지 반복해서 읽었다고 한다. 이 방법도 괜찮은 것 같다.
우리의 공부법에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는 깜지를 하는 식으로 단어를 외우지 않았다. 반복해서 보고 보았다. 눈으로 보고 나서 소리 내어 읽어 보기도 했다. 쓰는 것은 최소화했다. 일단 눈에 들어오게 표시를 했다는 점이 같은데 그 세부 방법이 다를 뿐이다. 나는 모르는 단어에 표시를 하고 읽기를 반복한 것이고 친구는 모르는 단어는 남겨두고 아는 것으로 표시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해서 확인한 것이다. 어쩌면 그 방법을 썼기 때문에 전교 1등을 하고 서울대 치의과에 들어간 것일지도 모른다. 흠. 이 이야기를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20년이 한참 지난 마흔이 다 되어서야 들었다. 미리 알았더라면 조금 달라졌을까?
그렇게 깜지를 쓰면서 단어를 외우지 않았어도 소리 내어 반복해서 읽으면서 정말 헷갈리는 단어와 안 외워지는 단어만 써 보았기에 효과는 오히려 더 좋았다. 그리고 문장이나 구문으로 외웠기 때문에 오히려 어울리는 단어나 구절을 파악하기 쉬웠다. 이렇게 외우는 것을 collocation이라고 한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고 이렇게 외우는 학습책들이 후에 많이 쏟아져 나왔다. 라떼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때는 정말 수학 문제집도 정석이 유일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고1 말 무렵 비로소 신사고니 디딤돌이니 하는 출판사들에서 책들이 막 나오기 시작했기에 학습 교재에서 선택의 범위가 매우 좁았던 것이 사실이다.
대부분의 문제집들은 다 버렸는데 마지막에 샀던 탑클래스라는 출판사에서 나왔던 독해 문제집 한 권만은 이십 년이 넘도록 아직 가지고 있다. 내용이 좋아서 가지고 있었는데 고등학교 이후로 한 번 펴보고 다시 덮어두었으니 처분을 하는 것을 맞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기념으로 한 권 정도는 가지고 있어도 되겠지! 하는 마음에 아직은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