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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옛글나눔 May 11. 2021

달팽이를 기르는 설(양와설;養蝸說)

어느 날 달팽이가 우리 집으로 왔다.

달팽이 두 마리를 키우기 시작했다.


달팽이가 우리집에 오게 된 데에는 긴 이야기가 있다. 집안의 최초 달팽이는 동생의 싱크대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해진다. 아마도 쌈채소에 딸려왔다가 씻겨내려가지 않고 용케 숨어있었나보다. 살겠다고 붙어있는 녀석이 애잔했는지 동생은 달팽이를 키우기로 했고 이왕 키우게 된 것, 한 마리는 아쉬웠던지 애완용 백와 달팽이 두 마리를 더 사서 키우기 시작했다. 이미 고양이 세 마리를 키우는 집이라 그런지 돌보는 생명을 늘리는 일에 과감하다. 그렇게 종종 달팽이는 잘 크고 있냐는 인사를 전하며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동생 집에 달팽이 알폭탄이 터졌다.


달팽이는 한 번에 수십 개의 알을 낳는데 애완으로 키우는 경우에 많은 개체 수를 키우기는 부담스러우니 어쩔 수 없이 알 상태일 때 냉동을 시키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동생은 코코피트 밑에 숨어 있던 알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때를 놓치는 바람에 졸지에 수십 마리의 아기 달팽이를 마주하게 되었다. 토종 명주달팽이면 모를까 백와 달팽이는 생태계 교란종이라 방생을 해서는 안 되고, 그렇다고 이미 두 눈 -뿔 아님- 을 높이 세우고 꼬물거리기 시작한 아기달팽이들을 매정하게 죽일 수도 없어 이리 저리 수소문을 하더니 결국 제주도에 있는 애완달팽이 농장에 보내는 것으로 해결을 봤다.


사실 제주도와 연락이 닿기 전 달팽이들은 식용달팽이 농장으로 가서 몇 개월 살다가 액기스가 될 운명이었다. 그래서 천안에 있는 달팽이농장으로 가던 길에 우리집에 들려 저녁을 먹던 중이었는데, 다행히 식사 중 제주도와 연락이 되어 목숨을 보전하게 된 참이었다. 기분 좋게 다시 집으로 달팽이들을 데려가려고 일어선 동생이 아기달팽이들을 보여주며 나를 살살 꼬셨다. 한 번 키워보라고. 귀엽지 않냐고. 나는 내방 책상 위에서 시들시들 목숨만 겨우 보전하고 있는 로즈마리 화분을 생각하며 달팽이를 위해서라도 거절을 했는데 남편이 그만 꼬드김에 넘어가버렸다. 생물을 키워 보고 싶다는 호기심에 덧붙여 약간의 야채랑 물만 챙겨주면 되고 하나도 어려운 것 없다는 난이도에 혹 한 모양이다.


몇 주가 지난 지금, 달팽이들은 남편의 보살핌 아래 다행히 잘 크고 있다.


만약에 이 달팽이가 커서 우리에게 알폭탄을 선사한다면, 혹은 수십 마리의 아기 달팽이를 마주 하게 된다면 나는 과연 동생처럼 달팽이의 구명(救命)을 위하여 여기 저기 전화를 돌리고 메일을 보내는 수고를 하게 될까? 처음 동생에게 수십 마리의 달팽이 부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냥 얼려버리지 뭐하러 동동거리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들기는 했다. 아무리 작은 생명도 소중하다지만 막상 나의 시간과 수고를 써야 할 정도의 소중한 생명에는 나름의 커트라인이 있기 마련이니까. 개나 고양이는 당연히 커트라인 통과. 모기나 파리 같은 곤충은 커트라인 밖. 그리고 직접 겪어보지 않은 전화기 너머의 아기달팽이들은 아직 커트라인 밖이었다.


사람마다 어떤 대상에 대해 그어 놓은 자신만의 커트라인이 있을 것이다. 실제 상황으로 맞닥뜨려 선택의 기로 - 달팽이를 얼리느냐 마느냐와 같은 작은 사건이라도 - 에 서기 전, 나 자신은 그 커트라인을 어디에 두고 살아가고 있는지 미리 고민해 보는 것도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


그런 고민에 생각할 거리를 보태고자 고려시대의 문장가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글을 소개한다.


슬견설(虱犬說)   *虱 이 슬

손님: “어제 저녁에 보니, 어떤 불량한 자가 큰 몽둥이로 돌아다니는 개를 때려 죽이는데, 모습이 하도 불쌍해서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없었네. 그래서 이제부터는 개, 돼지의 고기를 탐하지 않기로 맹세하였네.”

客有謂予曰。“昨晚見一不逞男子。以大棒子椎遊犬而殺者。勢甚可哀。不能無痛心。自是誓不貪犬豕之肉矣。”


나: “어제 보니, 어떤 사람이 불이 이글이글하는 화로를 끼고 이를 잡아 태워 죽이는데, 내가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없었네. 그래서 다시는 이를 잡지 않기로 맹세하였네,”

予應之曰。"昨見有人擁熾爐捫虱而烘者。予不能無痛心。自誓不復捫虱矣。"


손님: "(어이없어 하며) 이(虱)는 미물이지 않나. 나는 덩치가 큰 동물이 죽는 것을 보고 불쌍하여 말한 것인데, 자네는 이런 말로 대꾸하다니, 어찌 나를 놀리는겐가?”

客憮然曰。 "虱微物也。吾見厖然大物之死。有可哀者故言之。子以此爲對。豈欺我耶。


나: “모든 혈기가 있는 것은 사람부터 소ㆍ말ㆍ돼지ㆍ양ㆍ벌레ㆍ개미까지 살기를 바라고 죽기를 싫어하는 마음은 다른 적이 없으니, 어찌 큰 동물만 유독 죽기를 싫어하고 작은 것은 그렇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개나 이의 죽음은 똑같은 것이네....(중략)...자네는 물러가서 눈을 감고 조용히 생각해보게. 달팽이의 뿔을 소의 뿔 처럼 보고, 붕새를 메추리와 같이 보게 된 다음에야 내가 그대와 도(道)를 말할 것이네."

予曰。"凡有血氣者。自黔首至于牛馬猪羊昆蟲螻蟻。其貪生惡死之心。未始不同。豈大者獨惡死。而小則不爾耶。然則犬與虱之死一也。... 子退焉。冥心靜慮。視蝸角如牛角。齊斥鷃爲大鵬。然後吾方與之語道矣。"


커다란 개나 하챃게 작은 이나 자기 한 목숨대로 살고자 하는 본능은 똑같은데 왜 어느 한 쪽의 죽음이 더 안타까운 것이겠느냐는 주장은 다소 지나쳐보이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부정하기에는 나는 수양이 모자란 사람이라고 고백하는 것만 같아 뒤끝이 개운치 않다. 어느 태백산 고승이 모기에게 잔뜩 뜯기면서도 어차피 자연을 빌려 사는 몸, 고통이 무슨 대수냐고 평온해 하셨다는 글이 떠오른다.


사실 이 글은 벌레나 개미도 아끼며 살아야 한다는 동물 애호가의 입장에서 쓰여진 글이라기 보다는, 그 당시 지배집단이 민중을 핍박하는 것에 대한 풍자적 성격의 글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문학이란 독자가 능동적으로 이해하고 감상하면서 더욱 풍성해지기 마련이니, 이 글을 읽고 나의 주관적인 커트라인에 대해 고민해 본다 한들 지하에 계신 이규보 선생이 호통을 치지는 않으시겠지.


그러나 주관적인 문학 감상의 틀을 통해 보더라도 이 훌륭한 글은 왠지 나의 달팽이에 대한 커트라인을 세우는데 참고하기에는 고원(高遠)한 이야기라 좀 더 현실적인 조언이 필요하다. 현실적으로 모든 생명을 살리는 건 불가능한 얘기이니 그렇다면 일단 죽여놓고 쓴 글을 살펴보자.


지네을 죽인 것에 대한 설〔殺蜈蚣說〕

...

사람은 나와 동류(同類)이니 마땅히 인을 행해야 한다. 어찌 새, 짐승, 벌레, 물고기에게 뿐이겠는가. 그러나 죽일 만하면 죽여야 하니, 다만 그 것을 죽일 때는 깊이 생각하고 신중히 판단하며, 가엾게 생각하고 기뻐하지 말아야 할 뿐이다. 만약 죽일 만한 죄를 지었는데도 그 정황을 묻지 않고 절대 죽이지 않는 것을 인(仁)이라 여긴다면, 이 또한 사사로운 마음이지, 인의 온전한 본체가 아니다.

竊謂人我之類也,其所當仁之也。奚啻鳥獸蟲魚哉?而可殺則殺之,但其殺之也,服念而欽恤,哀矜而勿喜而已。若其罪可殺而不問其情,一切以不殺爲仁,則是亦私意也,非仁之全體也。

...

올빼미와 짐새, 승냥이와 이리, 독사, 고래와 악어같은 것들은 다 죽일 만한 것들이다. 만약 그것들을 몰아내어 멀리 보내고, 감동시켜 거처를 옮기게 하여 해가 되지 않게 하면 참으로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죽여야 할 뿐이다.

鳥而梟鴆,獸而豺狼,蟲而蛇虺,魚而鯨鱷,皆可殺者也。苟可以驅之而遠其跡,感之而徙其居,使不得爲害,則誠善矣,不然則殺之而已矣。

...

나는 벼룩과 이를 제지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만나기만하면 죽이고, 뱀이나 쥐 같은 종류도 또한 내버려 둘 수 없어서 쫒을 만하면 쫒고, 쫒아내도 가지 않으면 죽일 방도를 꾀하지 않을 수 없으니, 옛 어진 사람에게 죄를 얻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지네는 사람을 죽일 수 있으니, 벌레 중에 지독한 놈이다. 오늘 내 무릎 앞을 지나가기에 몰아냈지만 밖으로 나가지 않기에 어쩔 수 없어 그 놈을 죽였다.

余於蚤蝎與虱,旣無術以制之,故遇輒殺之,如蛇鼠之類,亦不能縱焉,可逐則逐之,逐而不去,則不得不謀所以殺之,未知不得罪於古之仁人否乎?蜈蚣能殺人,蟲之至毒者也。今日過吾膝前,驅之而不外向,不得已而殺之。


구사당(九思堂) 김낙행(金樂行, 1708~1766) 선생의 글인데 원문은 옛 성현의 글도 인용 되면서 내용이 더욱 풍부하나 여기는 부득이하게 생략하여 일부만 옮겼다. 유학자로써 군자는 생명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고 공부하였는데 벼룩과 이는 말할 것도 없고 지네까지 죽이고야만 나의 행실은 과연 어찌 보는 것이 좋겠는가에 대해 쓴 글이다. 이규보 선생의 글 보다는 좀 더 인간적인 고민이 엿보인다.


죽일 만 하면 죽일 수도 있지만, 그 죽일 만한 지의 여부는 신중히 판단해야 하고 또 불쌍히 여겨야지 기쁜 기색으로 죽여서는 안 된다는 말은 현실에서도 마음에 새길만 한 조언이다.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지네라 하더라도 일단 한 번 쯤은 살려주는 인(仁)의 마음을 발휘 해보고 그래도 어쩔 수 없기에 죽였다는 말에는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실천의 의지가 타오른다.


더구나 우리 집의 객식구가  달팽이는 사람을 해치는 동물도 아니고 꼬물거리며 야채를 갉아먹 일이 전부인데 () 발휘하지 못할 것이 어디있겠는가. 가능한  보살펴 주고 부득이하게 생명을 빼앗아야만 하는 비극의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 하는 것이 달팽이보다 이성적인 인간 종으로써 해야할 일이다. 그리고 나는 부득이한 상황이 발생하였을 때도 무심하게 돌맹이 버리듯이 하지는 않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달팽이, 커트라인 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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