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웅 할아버지가 96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워낙 건강하셔서 평생을 병으로 병원에 입원하신 적이 없었다.
젊은 시절에는 이름 있는 주조회사의 공장장으로 근무하셨다. 공장 안에 사택이 있었는데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유리창이 많이 달린 커다란 기와집이었다. 큰 기와집에서 부인되시는 분은 고운 한복을 입고 양지 마른 마루에 앉아 계시거나 한복 저고리 소매를 접고 앞치마를 입고 부엌에서 일을 하셨다. 공장에 근무하면서 할아버지는 2남 4녀의 자식들을 키우고 공부시키고 결혼시켰다. 똑똑한 딸들은 모두 서울로 올라갔고 작은 아들은 외국으로 유학 가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대학에 자리 잡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느 집이나 남들이 알거나 알지 못하는 우환은 있는 법이어서 할아버지네도 큰 아들이 정신이 온전치 못하여 자기 몫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픔이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맞았고 사람들의 입맛도 변하여 주조장은 문을 닫게 되었다. 공장과 사택이 있던 큰 규모의 땅에는 아파트가 들어섰다. 할아버지는 공장장을 그만두고 아파트 상가에 슈퍼를 내었다. 공장과 집이 있던 터에 들어선 아파트 상가였다. 작은 슈퍼였지만 천성이 부지런하고 건강한 할아버지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문을 열고 열심히 장사하였다. 부처님같이 후덕한 얼굴에 언제나 웃는 얼굴로 좋은 말을 건네시던 할아버지와 할머니 덕분에 슈퍼는 언제나 사람이 끌었다. 그렇게 밤낮으로 장사하여 모은 돈으로 십 년이 넘도록 유학비를 대고 결혼 자금을 대면서 금의환향하기를 기다리던 작은 아들은 할아버지의 자랑이었다. 모자란 큰 아들을 대신하여 집안을 일으키고 빛내 줄 것을 기대하면서 고된 장사일을 이겨내었다.
극심한 신경쇠약으로 정신적인 장애가 있어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고 집에 붙어 있던 큰 아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걱정거리였다. 그러던 큰 아들을 갑작스럽게 결혼을 시키게 되었다. 할아버지네 가정 사정을 환히 알고 있던 가까운 친척이 시골 마을에 있는 마음씨 좋은 처녀를 소개하였던 것이다. 결혼은 한 달 만에 성사되었다. 길게 가면 이루어지지 않을 결혼이었다. 남자와 세 번 만나고 결혼을 한 처녀는 남편이 정상이지 못한 것을 알게 되었다. 앞이 캄캄해지고 돌아가고 싶었지만 진심으로 미안해하면서 불안해하는 시부모님과 남편을 보면서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며느리는 착하고 현명하였다. 결혼 전에 유치원 선생님이었던 며느리는 무던하고 헌신적이었다. 자기의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기로 결심을 한 뒤로는 깍듯하게 위해 주는 시부모님을 자기 부모님처럼 모시고 피해 의식과 불안에 떠는 남편에게도 최선을 다하여 자존심을 세워 주고 부족한 부분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다행히 남편은 결혼 후 별다른 증세 없이 일상생활을 이어 갔고 자식도 아들, 딸을 두었다. 날마다 슈퍼를 지키는 시부모님을 대신해 집안 살림을 야무지게 꾸려내고 아이들을 잘 키워 내었다. 증세가 호전된 남편도 슈퍼에 나가 부모님을 돕기 시작했다.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주변에서는 사람 하나 잘 들어오더니 집안이 피기 시작했다고 며느리에 대한 칭찬이 자자하였다.
두웅 할아버지는 부족한 아들을 며느리에게 맡긴 죄로 최선을 다하여 며느리를 위했다. 타고나기를 건강 체질로 태어난 할아버지는 하루도 쉬지 않고 슈퍼문을 열고 뼈가 부서져라 일을 하였다. 슈퍼 일은 막노동 그 자체였다. 자신이 쓰러지면 집안을 건사할 수 없다는 생각에 시간 맞춰 운동하고 건강을 지키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집안 살림을 맡은 며느리는 소박하고 부지런하였다. 마실을 돌거나 밖으로 나다니지 않고 집안 이야기를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큰 살림을 하였던 시어머니의 뜻을 질 받으면서 야무지게 살림을 배웠다.
할아버지는 구십 세가 넘을 때까지 슈퍼 일을 계속하셨다. 거의 40년 가까운 세월을 같은 장소에서 슈퍼를 운영하여 아파트에서 가장 오래된 주민이자 주인이었다. 그 사이 아이들을 다 키운 며느리가 슈퍼에 나와 부모님과 남편을 도왔다. 남편은 평상시에는 조용하고 얌전했지만 병이 한 번 도지면 부인을 의심하고 폭력을 행사했다. 부인은 남편의 기분이나 정신이 이상해지면 남편을 피해 슈퍼에 머물면서 남편이 잠들기를 기다리거나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 이런 아들 며느리와 같이 살면서 무던히도 며느리를 감싸고 돌았지만 두 분의 마음은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성공하여 돌아오리라고 기대하였던 둘째 아들은 원했던 대로 자신의 진로가 풀리지 않자 가족과 소식을 끊고 잠적하였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구십 중반이 넘어 할머니가 먼저 세상을 뜨셨다. 할머니는 이런저런 병들로 시달렸지만 큰 병은 없으셨다. 평생을 동고동락하며 함께 헤쳐 나가던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할아버지에게 치매가 찾아왔다. 순한 치매였지만 가끔 며느리를 의심하는 행동을 보였다. 아마 아픈 아들을 참지 못하고 며느리가 집을 나갈 까봐 평생을 노심초사하였던 마음고생이 정신을 놓자 무의식 중에 드러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정신이 돌아오면 더할 수 없이 자상하고 인자한 시아버지가 되어 며느리를 위하고 위로했다. 치매가 조금 더 깊어지면서 며느리는 할아버지의 똥수발을 해야 했다. 할아버지가 집을 나가 온 시내를 뒤지고 경찰서에 신고하여 할아버지를 찾는 등의 수고도 했지만 며느리는 평생을 같이 살고 자신을 지켜주었던 시아버지를 요양원으로 보낼 수가 없었다.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자신이 지키겠다고 마음먹었다.
코로나가 끝나 갈 무렵 할아버지가 기력이 없자 병원에 가서 링거 하나 맞고 나오자고 병원을 찾았다. 병원에서는 할아버지가 열이 있다고 입원하여 증세를 지켜보자고 했다. 간병인을 찾아 할아버지를 부탁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루가 지난 다음날 저녁 할아버지가 주무시자 간병인도 잠이 들었다. 간병인이 미처 깨어나지 못한 새벽에 병실을 돌던 간호사가 할아버지의 숨소리가 이상한 것을 발견하였다. 며느리에게 연락하였다. 할아버지의 숨소리가 이상하다고. 금방 돌아가실 것 같다고. 할아버지의 임종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지만 빨리 오라고 하였다. 며느리가 부리나케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할아버지는 그 사이에 세상을 떠나셨다. 침대에 누워서 주무시듯이 가셨다. 할아버지의 몸을 만져 보니 따뜻한 온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렇게 조용히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길고도 고단하였던 할아버지의 삶은 조용하고 깨끗하게 마무리되었다. 평생을 바쳐 온몸으로 한 가정을 지켜 내었던 할아버지의 일생은 힘들었지만 위대하였다. 자기에게 불어닥친 운명과 맞서 쓰러지지 않고 버텨내었던 할아버지의 삶은 대단하였다. 병든 아들과 못내 잊히지 않는 고마운 며느리, 집안을 일으켜 세울 것이라고 믿고 이십여 년을 뒷바라지했지만 결국은 가정도 깨지고 소식도 끊어버린 아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회한, 당신이 떠난 뒤에 남을 아픈 아들과 가정에 대한 걱정을 평생 안고 살았을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인간의 삶은 강인하고도 질긴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