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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희 마리아 Oct 29. 2024

덕헌 선생님

덕헌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평생을 인생을 개척하며 살아오셨던 분 답지 않게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다. 어찌 생각하면 덕헌 선생님의 삶답게 선명하고 굵게 삶을 마감하셨는지도 모른다. 


덕헌 선생님의 평생은 도전에 도전을 거듭하는 삶이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에 나무를 심는 것 같은 일생이었다. 일제 식민지 시절에 태어나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몸으로 관통하며 사셨다. 


덕헌 선생님의 기억에 남은 첫 번째 역사적 사건은 6.25 전쟁이었다. 당시는 농업이 주 산업인 농경시대였다.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땅 없는 소작인으로 서럽게 살던 사람들은 토지 무상분배를 외치는 인민군을 환영하고 지주들을 처형하는데 동참하였다. 정겹게 살던 동네 사람들끼리의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이었다. 당시 배움이 좀 있었던 사람들은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가 많았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서 민족 해방운동의 일환으로 생각하였던 때문이었다. 


큰 지주는 아니지만 작은 지주 정도 되었던 덕헌 선생님 집안도 풍비박산되었다.  똑똑하여 일본 유학을 한 첫째와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둘째가 공산주의에 경도되었다가 첫째는 경찰에게 사형을 당하고 둘째는 인민군 낙오 부대와 함께 지리산으로 입산하여 생사를 모르는 변고를 당하면서 덕헌 선생님의 집안은 쌀 한 톨 건지지 못하고 완전히 몰락하였다.


이때부터 덕헌 선생님의 인생 개척기가 시작된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어렵사리 사범학교를 다니면서 집안 일과 학업을 병행했지만 이렇게 저렇게 도와주신 선생님들 덕분에 무사히 졸업을 하였다. 그 시절에 덕헌 선생님이 받았던 사랑은 훗날 학생들과 주변 사람들을 사랑으로 보살피고 돌보는 원동력이 되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부임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덕헌 선생님은 인생의 방향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부(富)를 좇을 것인가, 귀(貴)를 좇을 것인가, 권(權)을 좇을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부(富)를 추구하기로 마음먹는다. 자라면서 겪었던 고생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고 자식들에게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교편생활을 접고 건축사업에 뛰어들었다. 천신만고 끝에 건설업계에서 필수적인 건설 기술자 자격증을 따자 귀한 건설 기술자 자격증 때문에 큰 건축회사에서 서로 모셔가려고 하였다. 마침 건설의 붐이 불고 덕헌 선생님은 지역의 커다란 빌딩과 관공서 등을 도맡아 지어 내면서 그 지역에서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건축가로 이름을 알렸다. 인생의 목표로 삼았던 돈도 많이 벌었고 가정도 안정되었고  지역의 유지도 되었다. 


덕헌 선생님은 자신이 목표하였던 경제적 기반을 잡게 되자 “돈이 인생의 전부인가” 하는 생각에 봉사활동을 시작하였다. 경찰서를 찾아가 비행 청소년들을 선도하는 일을 맡겨달라고 부탁하여 청소년 범죄 예방위원이 되어 비행 청소년들을 선도하였다. 출소한 아이들에게는 사회적응훈련과 직업훈련을 시켜 범죄가 재발되지 않도록 하였고 평일에는 길거리의 비행 청소년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범죄 예방을 위해 노력했다. 


노년에 들면서 덕헌 선생님에게도 이러저러한 크고 작은 병마가 찾아왔다. 그때마다 잘 다스리고 달래서 조심스럽게 넘어오던 어느 때였다. 미수라고 불리는 88세가 되던 해였다. 2남 2녀의 자녀들과 함께 미수 잔치를 조촐하게 치른 뒤였다. 그전부터 자꾸 넘어지시는 아버지를 걱정한 자녀들이 서둘러 병원에서 검사를 해보니 경추 쪽에 문제가 있다는 소견을 받았다. 수술을 받지 않으면 목 아래쪽으로 전신마비가 온다는 진단이었다. 이미 심장박동기를 달고 계신 88세 된 노인에게 수술을 권할 수도 없지만 수술을 받지 않으면 몸이 빠른 속도로 경직되어 마비된다는 것이었다. 가족들은  수술을 받기로 결정하였다. 덕헌 선생님도 이야기를 듣고 수술을 받겠다는 용기를 내었다. 


큰 대학병원에서 한 수술은 잘 되었다. 수술 경과도 좋아 가족들과 면회도 하였다. 가족들의 안부를 주고받으며 재활에 들어가기로 하였다. 수술 후 일주일이 되는 월요일부터 일반실로 옮기고 재활을 시작하자고 하였다. 염려했던 수술이 끝나고 재활을 시작한다는 희망에 부풀어 가족들도 한시름 놓고 재활을 위한 준비로 분주하였다. 


일요일 새벽, 병실을 순회하던 간호사가 덕헌 선생님을 살펴보니 이미 돌아가신 것이 아닌가. 옆에서 돌보던 간병인도 같이 잠이 들어 선생님이 돌아가신 것을 몰랐다. 주무시다가 심장이 멈췄던 것으로 짐작할 뿐이었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가족들은 황망하고 허망하였다. 큰 아들은 생전에 아버지가 자기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며 울었다. 한참 방황하던 시절, 아버지가 전화하여  "나는 너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얼마나 자기를 위로하였는지 모른다고 했다. 아버지의 그 말씀 때문에 자기가 돌아올 수 있었고 지금의 자리에 있게 되었다고 회고하였다. 자녀들 모두 각자 아버지에게 받았던 용기와 격려를 생각하며 울었다.  


세상에서 자기의 마지막을 짐작할 사람이 있을까.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들의 임종을 짐작할 사람이 있을까. 자기의 마지막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가족이나 이웃의 마지막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나에게 허락된 삶을 경외하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 말 한마디 없이 떠나셨지만 덕헌 선생님이 삶으로 보여 주셨던 강인한 개척 정신과 넓은 포용력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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