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으로 배우는 배달말(10) 수리병, 시루봉, 시룩골, 시리재
‘수리’라는 말
배달말 사전에서 ‘수리’를 찾으면 뜻이 자그마치 열다섯이나 된다. 이 가운데 열둘은 한자말이고 셋만 배달말이다. 독수리, 참수리 같은 수릿과 새를 싸잡는 말로, 음력 5월 5일인 단오를 달리 이르는 말로, 밤이나 도토리, 개암의 한 부분이 상해서 퍼슬퍼슬해진 것을 가리킨다고 풀어놨다. 귀퉁이가 조금 상한 도토리나 밤 따위를 가리키는 말인 줄은 처음 알았다. 내가 ‘수리’라는 말을 배달말 사전에서 찾은 까닭은 ‘수리병’이라는 땅이름 때문이다. ‘수리병’은 앞에서 본 ‘고지병’과 마찬가지로 벼랑을 가리키는 말일 텐데, 앞엣말 ‘수리’는 무슨 뜻으로 붙은 말일까.
독수리가 새끼 치는 벼랑?
≪동해시 지명지≫에서 ‘수리병’을 찾았다.
이기령을 넘어가는 쪽에 우뚝 솟은 바위 절벽을 가리킨다. 이 곳의 꼭대기에 독수리가 새끼를 쳤다고 한다.(171~172쪽)
구이터마을 뒤쪽, 달방동 쪽에 있는 산. 이 곳에 독수리가 늘 살고 있어서 생긴 이름인데, ‘수리’에 ‘병애’가 붙었던 것이 ‘수리병’으로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199쪽)
‘(독)수리가 살던 병애’라서 ‘수리병애’라고 하다가 ‘수리병’으로 말이 줄었다고 하면 설명은 참 깔끔하다. 하지만 땅이름에서 ‘수리’는 하늘 높이 나는 ‘새’가 아니라 ‘수릿날’이나 ‘정수리’ 같은 말에서 보듯 ‘높은 곳’이나 ‘맨 꼭대기’, ‘으뜸’이라는 뜻으로 써왔다. 수릿날은 1년 중 해의 기운이 가장 왕성한 날로 ‘천중절’(天中節)이라는 딴이름이 있다. 해가 하늘 한가운데 있어서 우리 머리 숫구멍이 있는 자리인 정수리를 똑바로 내리쬐는 때다. ‘봉우리’는 ‘봉수리’에서 ‘ㅅ’이 떨어져 간 말이라고 한다. 수리는 언뜻 봐서는 원래 뜻을 알아채기 어려운 ‘술, 시루, 시라, 사라, 사리, 서리, 소리, 소래, 살, 쌀, 설, 솔, 수락, 수레’ 같은 다양한 꼴로 둔갑하여 나타난다. 우리 나라 곳곳에 있는 ‘시루봉’도 ‘수리’가 모양을 바꿔 생겨난 말이요 수락산, 싸리재, 서래봉, 속리산도 말밑을 더듬더듬 따라 가보면 ‘수리’에 가 닿는다.
수리에서 생겨난 땅이름들
동해시에도 ‘수리’에서 가지 친 땅이름이 제법 된다. 비천동 ‘시루봉’(344미터)과 시루봉 아래 있는 마을인 ‘시룩골’, 신흥동에 있는 ‘시리재’도 톺아보면 ‘수리’에서 생겨난 말이다. 시리재는 신흥동 명지막골에서 정선군 임계면으로 넘어가는 ‘높은’ 고개라서 ‘시리재’가 되었다. 그런데 이들 땅이름이 ‘수리’에서 생겨났다는 게 흐리터분해지면서 봉우리가 시루를 닮았다거나 호랑이에 물려 죽은 사람을 묻고 시루를 엎어놓던 고개라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들이 전한다. 물론 옛이야기로서 가치를 낮잡아 보려는 마음은 아니니 오해 없길 바란다.
말이 샛길로 샜지만 ‘수리병’은 독수리가 둥지를 틀고 살던 벼랑이 아니라 아주 높은 벼랑이라서 붙인 땅이름이다.
배달말 한입 더
‘높다, 맨 위, 으뜸’이라는 뜻으로 써온 배달말 ‘수리’는 한자 땅이름에서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가령, 술령(述嶺), 술성(戌城) 술이홀(戌尒忽), 수리봉(修理峰, 守理峯), 수리산(修理山), 수니홀(首爾忽)는 소리 빌려 적기이고, 취산(鷲山<수리뫼), 차령(車嶺<수레재), 증산(甑山<시루봉) 같은 땅이름은 새김 빌려 적기인 셈이다.
지도 출처: ≪조선지형도≫. 1910년대 강원도 삼척시 증산동. 증산은 시루 증(甑) 자, 뫼 산(山) 자를 쓴다. 시루뫼다. ≪삼척향토지≫(삼척시립박물관, 2016, 27쪽)는 “증산리(甑山里), 지형이 시루[甑]와 같음으로 증산(甑山)이라 불렀다. 즉 (실뫼ㆍ실르산)”고 풀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