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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목과 견소

땅이름으로 배우는 배달말(12) 견소, 견조,  젠조, 젠주, 안목

by 이무완 Feb 22. 2025

[일러두기] 이 글에서 밑금 그은 붉은 글자는 옛 배달말 적기에서 쓰던 아래아(.)가 든 글자다. 


‘‘안목’은 본디 ‘앞목개’가 말밑으로 ‘안목개/안목’로 쓰다가 ‘안목’으로 줄어든 땅이름이라고 했다. 그래서 한자 땅이름도 ‘앞목개’를 뒤친 ‘남항진’이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참고: 남항진의 옛 이름안목) 오늘날 행정구역과 달리 옛 사람들은 산줄기나 강, 내 같은 자연환경을 살피로 삼아 말하는 까닭에 똑부러지게 이 곳 저 곳을 구분짓지 않았다. 그래서 ‘안목’과 ‘견소’의 어름이 겹치긴 해도 분명히 다른 곳이었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견소’(견조)는 이 일대를 싸잡는 동 이름으로 내주고 자신은 남대천 건너에 있는 남항진의 배달말 이름을 가로채서는 ‘안목’으로 행세하는 꼴이다.  


안목은 본래 견조였다?

‘디지털강릉문화대전’에서 ‘안목 마을’을 설명한 데를 보자.       

안목마을은 원래 견조(見潮)라고 했다. 그런데 안목마을 앞의 견조봉(堅造峰)에 올라가 남대천에서 흘러온 물이 바다로 빠지는 것을 보면 물살이 흐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하여 견소(見召)가 되었다. <대동여지도>에는 ‘견조’로 표시되어 있다. 견조봉은 원래 육지와 약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작은 섬이었으나 해류의 작용에 의해 육지와 섬 사이가 모래로 연결되었다. 이것을 ‘육계도(陸繫島)’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이 견조봉에 봉수대가 있었는데 소동산 봉수로 불렸다. 이 마을은 앞목 또는 안목(安木)이라 부르는데 이는 견소동 마을 전체의 지명이기도 하다. 물 건너 남쪽의 남항진과 한 마을이었으나 현재는 남대천이 가로질러 다른 마을이 되었다. ‘앞목’이란 ‘남항진에서 젠주와 송정으로 가는 마을 앞에 있는 길목’이란 뜻이다. 또한 마을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가면서 왼쪽에 새로 생긴 마을인 새말이 있다.   

간추리자면 이렇다. 본디 마을 이름은 ‘견조’(見潮)인데, 마을 앞 견조봉(堅造峰)에 올라 바다로 흘러드는 남대천을 보는 곳이라고 해서 ‘견소’(見召)가 되었으며, 오늘날엔 안목 마을을 비롯하여 이 지역을 두루 싸잡는 땅이름이 되었다는 말인데 나도 모르게 고개가 삐끗 꼬인다.     

<강릉부지도>(1872)나 <조선지형도>(1909~1917)나 견소/견소진과 남항/남항진(안목개)를 다른 곳으로 구분했다. 

견소, 견조, 젠조, 젠주

그렇다고 치면 ‘견조→견소→안목’처럼 바뀌는 과정을 매끄럽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견조→견소’는 설명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다음 단계인 ‘견소→안목’에서 턱 막히고 만다. 더욱이 ≪강릉부지도≫(1872)나 ≪조선지형도≫(1909~1917)는 ‘견소’와 ‘남항’을 분명히 구분했다. ≪대동여지도≫(1861)는 남대천(남천) 앞바다에 섬처럼 그려놓고 ‘堅造’(견조)로 적어놓았지만, ≪조선지형도≫에 와서는 작은 섬(견조)이 사라지고 없다. 모래가 쌓이면서 뭍처럼 되었기 때문이다.  

≪강릉부지도≫와 ≪대동여지도≫ 이후에 나온 ≪조선지형도≫에도 ‘견소진리’로 나온다. 비슷한 때에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이 낸 ≪조선지지자료≫(1919)에는 ‘見召里/젠조’로 적었다. 잘 알다시피 일제가 낸 ≪조선지형도≫와 ≪조선지지자료≫는 일제가 이 땅의 경제를 자신들 손아귀에 죄다 집어넣으려는 어두컴컴한 속셈으로 ‘조선토지조사사업’의 결과다. 암튼, 이미 ‘견조’보다는 ‘견소’가 더 오래된 땅이름이며 지역 말로는 ‘젠조’, ‘젠주’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박곡’은 바깥 마을, ‘견박’은 개 바깥 마을

견소(見召)와 견조(堅造)와 견조(見潮)라고 한자 표기는 여럿이지만 앞소리마디는 [견], 뒷소리마디는 [소], [조]다. 이들 소리마디는 바닷가에 터잡고 살던 사람들이 써온 땅이름받아적을 요량으로 한자를 빌려 썼다고 보면 실제 소리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마침 동해시 북평동에 ‘견박’이라는 곳이 있었다. '견박'과 '견소/견조'는 앞소리마디가 겹친다. '견박곡'은 앞 시대엔 ‘박곡’(璞谷)이었고 그 뒤 ‘견박’(見朴), ‘견박곡’(見朴谷)으로 바뀌었다. 뒤엣말 ‘박’(朴)은 ‘밖’을 소리로 적은 한자로 본다. 박곡은 본디 밖골, 밖굴(←바ᇧ구리)인데, 뒷날 ‘바ᇧ구리’를 ‘所古里’(소고리)로 적기도 했다. ‘소고리’는 ‘바 소(所)+고리(古里)’ 짜임으로 보면 ‘바ᇧ구리’로 뒤칠 수 있다. 문제는 앞엣말 ‘견’(見)이 무슨 까닭으로 끼어들어 ‘견박’(見朴)이 되었는가 하는 데 있다. ≪동해시 지명지≫(2017)는 “예전에 ‘큰바구리’라는 지명이 있어 ‘큰’을 그와 유사한 음을 가진 한자 見으로”(133쪽) 적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한다.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견박’을 소리가 어금지금한 ‘갯밖’에서 온 말이 아닐까 싶다. 이때 ‘개’는 동해시 남부 지역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전천(箭川)이다. ‘개 바깥’이란 뜻으로 ‘갯밖’이라고 했고 이 말이 ‘갱밖/겡밖/겐밖’ 따위로 다양하게 소리 바꿈이 일어나면서 책상물림들 귀에는 ‘견박’으로 들리지 않았을까. 지역 말에 ‘갱변/겡벤’이 있다. 물 가장자리에 잇닿아 있는 땅을 가리키는 동시에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이나 바깥이란 뜻으로도 써 왔다. 


견소보다 앞에 있던 땅이름

강릉시 동쪽 바닷가 마을인 ‘견소’의 견(見)은 [갠/겐/갱/겡…] 같은 소리를 받아적은 한자요 소(召)는 [소/조]라는 소리를 받아적은 한자로 봐야 한다. 소(召)의 중국음은 [zhào: 조]인데, 우리도 ‘대추’라는 뜻으로 쓸 때는 ‘조’로 읽는다. 이로 보면 ‘견소’(見召)를 ‘견조’(堅造, 見潮)로 적은 까닭을 말할 수 있다. ≪대동여지도≫는 ‘섬’처럼 그려놓은 곳에 ‘견조’(堅造)라고 적었다. 지도에서 보면 남대천 큰 물줄기와 남서쪽에서 흘러온 섬석천 냇줄기가 어우러지면서 바다로 들어가는 자리니 바닥이 물러서 늪(沼) 같기도 하고 물이 철벅대는 개(浦) 같기도 한 곳이다. 그런 땅을 무어라 할까. 

강릉 말에 ‘갯물’이 있다. 배달말 사전은 “강이나 내에서 흘러드는 바닷물”로 풀이해 놨지만 이곳 사람들한테 ‘갯물’은 ‘개(浦)의 물’, 곧 호숫물이란 뜻으로 쓴다. ‘경포호’를 ‘경포개’라고도 했는데 ‘호’(湖)를 ‘개’의 뜻으로 썼음을 알 수 있다. 견소 마을은 남대천 끝자락이 모래불로 막힌 곳이니 얼마든지 ‘개’로 볼 수도 있다.

옛 기록이 있으면 좋겠지만 찾을 수 없으니 내 생각으로 말한다면 개(浦)와 같은 늪(沼) 마을로 여겨 ‘개소’나 ‘갯소’라고 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때 소(沼)는 흔히 못을 가리키거나 폭포나 개울 바닥이 우묵하게 꺼진 데를 가리키지만 늪을 일컫기도 한다. ‘갯소’와 어슷한 말이 사람들 입에서 닳고 닳으면서 [갠소/겐소/갱소/겡소…]처럼 다양한 꼴로 나타났고 한자로 받아적는 사람 귀에는 ‘견소’(見召)처럼 들렸지 싶다. 잘 알다시피 강릉 말에서 ‘겻불’은 ‘젯불’이 되고, ‘겨릅’은 ‘저릅’이 되고, ‘경포대’는 ‘겡ː푸대’로 둔갑한다. [ㅕ] 소리가 어렵지 않게 [ㅐ]나 [ㅔ]로 바꿔 소리내는 말버릇 영향이다. 자연스런 귀결로 [갠소/겐소/갱소/겡소…] 같은 소리를 얼마든지 ‘견소’(見召)로 받아 적을 만하다. 그런데 ‘見召’에서 ‘소’(召)는 ‘대추 조’로도 읽을 수 있는 까닭에 한동안 ‘견소’, ‘견조’가 같이 쓰인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말밑이 흐려지고 같은 소리라면 좋은 뜻을 보탤 요량으로 ‘견조’(堅造: 바닷물을 막아 세우다), ‘견조’(見潮: 바닷물을 보다) 같은 말이 생겨난다. 권세 있는 벼슬아치들이나 잘난 양반들은 한글보다 중국 글자 쓰는 걸 더 모양 나는 일로 여겼고 지금도 다르지 않다. 글깨나 읽은 분들이 ‘견조’라고 하니 가난하고 힘 없는 백성들은 그게 아니라고 토 달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게 그 말인가 하고 따라갈 수밖에. 물론 한자를 생각하지 않고 말하다 보니 ‘겐조, 겐주, 젠조, 젠주’ 같은 새로운 말을 다시 만들어냈으리라. 하기야 이런 일이 새삼스럽지도 않다.      

지도 출처: 국토지리정보원

견소와 안목은 딴 마을이다

말이 길었다. 여기까지 읽고 내 말에 딴죽을 걸고 싶은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본디 말밑이 ‘갯소’인지 아닌지 흐리터분한데 ‘갯소→견소→견조→겐주/겐조→젠주/젠조’로 바뀌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냐고 말이다. 백 번 옳은 말이고 매우 온당한 지적이다. 다만 나는, ‘견소’라는 한자 땅이름에서 비롯한 말이 아니라는 점, ‘견소’와 ‘안목’은 남대천을 사이에 둔 딴 마을이었다는 점, 또 오늘날 ‘남항진’이 본디 ‘안목’이라는 땅이름의 임자였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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