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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구석

땅이름으로 배우는 배달말(16)

by 이무완 Feb 28. 2025

어둑시근하고 막다른     


오대(五代)나 날인다는 크나큰 집 다 찌글어진 들지고방 어득시근한 구석에서 쌀독과 말쿠지와 숫돌과 신뚝과 그리고 녯적과 또 열두 데석님과 친하니 살으면서// 한해에 멪번 매연지난 먼 조상들의 최방등 제사에는 컴컴한 고방 구석을 나와서 대멀머리에 외얏맹건을 질으터 맨 늙은 제관의손에 정갈히 몸을 씻고 (뒤줄임)     


백석(1912~1996)이 쓴 ‘목구’(木具)의 앞부분이다. 목구는 나무를 깎아 만든 제기로 제사 때가 되어야 어둑시근한 곳에서 나와 늙은 제관의 손에서 정갈히 몸을 씻고 제삿상에 오른다. 들지고방은 들문만 있는 고방, 그 광에서도 목구는 구석진 데에 있다. 이처럼 구석은, 있지만 쑥 들어간 자리라서 평소엔 우리 눈길에서 벗어난 곳이다. 외지고 그늘지고 보얗게 먼지 앉아 곰팡내 나는 먹먹한 자리다. 때로는 길이 끊기고 벽을 쌓아 더는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끝을 뜻하기도 한다. 물론 세상사 마음 먹기 나름이라고 보는 눈길에 따라선 비집고 들어가 고달픈 현실을 잊고 숨을 고르면서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 모퉁이일 수 있다.      


게구석엔 ‘게’, 개구석엔 ‘물’

동해시에 ‘○구석’이라는 땅이름을 단 데가 몇 있다. 묵호항 뒤편에 ‘게구석’이 있고, 남쪽 천곡동 한섬 바닷가에 ‘개구석’이 있고, 망상동 심곡 마을에는 ‘괴구석’이 있다. 

‘게구석’은 발한동과 묵호진동 살피에서 서쪽에 있는 골짜기를 가리킨다. 묵호항이 없을 때는 바닷물이 이곳까지 밀려 들어와 게가 버글댔다고 한다. 게를 잡던 구석진 곳이라서 붙은 이름이라고 하지만 바닷물이 드나드는 개라면 어디든 바위게나 방게가 산다. 한섬에 있는 ‘개구석’과 마찬가지로 게를 잡았다는 이야기가 보태지면서 ‘게구석’이 되었으리라. 

개구석은 말 그대로 개(浦)의 구석이다. ‘개’는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이다. 한섬 남서쪽 바닷가 구석으로 바닷물이 드나드는 데라서 ‘개구석’이라고 했다. 천곡천이 흘러와 바다와 만나는 곳인데, 지금은 그 위로 기찻길과 해안도로가 지난다     

천곡천이 흘러와 한섬 개구석에서 동해 바다로 들어간다. 위로 해안도로와 그 뒤편으로 보이는 다리는 기찻길이다. 천곡천이 흘러와 한섬 개구석에서 동해 바다로 들어간다. 위로 해안도로와 그 뒤편으로 보이는 다리는 기찻길이다. 


괴구석의 ‘괴’는 고양이인가

‘괴구석’은 망상동 심곡 산제골과 범지막골 아래에 우묵하게 들어간 자리다. ‘괴+구석’ 짜임으로 이때 ‘괴’는 ‘고양이’라고 한다. ≪몽예집≫(남극관, 1713)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고려사≫에서 방언으로 고양이를 ‘고이’라 한다고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단지 소리를 조금 빠르게 내면서 한 글자로 되었다.(高麗史云方言呼猫爲高伊 今猶然但聲稍疾合爲一字)    


 ‘고이’를 빠르게 소리 내면 ‘괴’처럼 된다는 말이다. ‘괴’에 작은 것을 뜻하는 뒷가지 ‘-앙이’가 붙은 ‘괴앙이’가 된 다음 ‘괴양이’가 되고, 다시 ‘고양이’가 된 셈이다. 동해나 삼척 지역 어른들은 고내이, 고니이, 고얘이라고 했다. 이 말에 ‘구석’을 붙여 ‘괴구석’이 되었다고 한다. 괴구석에 있는 석회동굴 이름이 ‘꾀꾸무굴’이다. 아무리 가물어도 샘이 마르는 일이 없었는데 어느 해인가 산 임자가 굴을 개발할 요량으로 굴 어귀를 허물었는데, 그뒤로는 물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 석회동굴을 한자로는 ‘묘구항(猫究項)’으로 적었다. ‘괴’를 뜻옮김하여 ‘묘(猫)’로 썼다. 하지만 ‘고양이’하고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가령, 구호동에 있는 ‘괴굼’은 “이 곳의 바깥쪽에 고양이가 쥐를 바라보는 형상으로 생긴 바위가 있어서 고양이처럼 생긴 움푹한 곳”(동해시지명지, 341쪽)이라서 붙은 이름이라고 어설프게나마 ‘고양이’와 얽으려고 한 노력이 보인다. 그런데 ‘괴구석’은 어떤 까닭으로 ‘괴’가 앞머리에 붙었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배달말에서 ‘괴’는 ‘괴발디딤’, ‘괴발개발’에서 보듯 흔히 ‘고양이’를 말한다. ‘괴춤’이나 ‘괴불’이라는 말도 있지만 딱히 땅이름하고는 연관이 없다. 괴춤은 ‘고의춤’의 준말로 “고의나 바지의 허리를 접어서 여민 사이”를 말한다. ‘괴불’은 “어린아이가 주머니 끈 끝에 차는 세모 모양의 조그만 노리개”로 ‘괴불주머니’라고도 한다. 괴불은 본디 연뿌리에 생기는 끝이 뾰족한 열매를 말한다. 귀신과 액을 물리치는 뜻이 있는데 비단을 세모나게 접어 속에 솜을 통통하게 만든다. 

      

골짜구니 깊고 낮은 자리

‘괴’의 뜻을 짐작할 만한 또 다른 실마리로는 이 마을에서 멀지 않은 마을 이름인 ‘괴란’을 들 수 있다. ≪동해시 지명지≫는 “속지명 골안과 한자 지명 槐蘭(괴란)과의 사이에는 다소 거리가 있어 신빙성이 적다”(35쪽)고 보았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산골짜기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서 ‘골 안’이 말밑이 되지 않았을까. ‘골안’이 ‘고란’을 거쳐 ‘괴란’이 되었듯 ‘괴구석’도 같은 맥락으로 보면 ‘골+구석’이다. 골짜구니 깊숙한 자리요 물이 날 만큼 낮은 곳이기에 ‘골구석’이라고 했고, 이 말이 ‘골구석→ 괼구석→ 괴구석’으로 소리바꿈이 일어난 듯하다. 


배달말 한입 더

괴발디딤 고양이가 발을 디디듯이 소리 나지 않게 가만가만 발을 디디는 짓.

괴발개발 고양이 발과 개 발이라는 뜻으로 글씨를 아무렇게나 써 놓은 모양. ‘개발새발’로 쓰는 사람이 많아지면 2011년 복수 표준어로 삼았다. 다만 본디 말은 ‘괴발개발’이다. 

괭이 ‘고양이’의 준말. 괭이갈매기, 괭이눈, 괭이밥, 괭이잠 같은 말은 모두 고양이의 습성이나 특징을 따서 붙인 이름들이다. 

나비 배달말사전에서 ‘나비’를 찾으면 날개 달린 곤충 말고 “고양이를 이르는 말”이라는 뜻매김도 있다. 우리 둘레에서 보면 ‘고양이’를 ‘나비’나 ‘야옹이’라고 부르곤 한다. 야옹이는 그런다손 쳐도 ‘나비’는 생뚱맞다. 바람이 전하는 말로는 고양이 얼굴이 나비를 닮았다거나 고양이가 나비를 쫓아다니길 좋아한다고도 하지만 믿을 만한 말은 아니다. 오히려 옛말 ‘납’을 뿌리말로 보고 여기에 뒷가지 ‘이’를 붙여 생겨난 말로 보아야 한다. 납은 몸이 재빠른 짐승을 가리킨다. 납의 흔적은 원숭이를 달리 가리키는 말인 ‘잔나비’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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